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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의 노래 ㅡ 정용애 시인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Feb 28. 2025








                떠나는 이의 노래




                            정용애



아침 햇살이 삼거리 육교 난간에 부딪혀 반짝인다. 이른 시간인데도 공기는 이미 더위를 머금고 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더위는 한층 깊고 끈적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찻길을 내려다본다. 출근길 차량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저마다 먼저 가겠다고, 경적을 울리며 조급한 마음을 내보인다.

“사장님, 어젯밤에 술 한잔하고 늦게 자서 지각하겠어요.”
“양보 좀 해주세요.”
“이보시오, 나도 더워서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출근하는 길이오. 순서대로 가야지.”

도시의 아침 풍경은 언제나 그렇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얽히고설킨 사정들, 그리고 피곤에 절은 얼굴들. 그 사이, 나만이 멈춰 서 있다. 육교 위에서 바라보는 이 도시는 이제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느껴진다.

여기서 얼마나 살아왔던가. 북악산과 인왕산, 삼각산이 감싸 안은 이곳에서, 세 개의 터널을 지나 흐르는 홍제천을 보며 하루를 열고 닫았다. 산과 강이 있는 서울의 한 자락, 도시이면서도 산골 마을 같은 곳. 처음 이곳에 자리 잡았을 때, 나는 이 동네가 서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수십 년. 바쁜 일상에 치이며, 가족을 돌보며, 삶을 지켜내며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오늘, 나는 문득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육교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지나간 세월을 돌아본다. 바람 한 줄기가 볼을 스친다. 마치 나를 위로라도 하듯, 부드럽게 다가오는 바람. 나는 속삭이듯 바람에게 말을 걸어본다.

“바람아, 내 말 좀 들어볼래? 이곳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어. 이제는 외출을 꿈꾸고 있단다.”

더 먼 곳, 더 조용한 곳, 자연이 품어주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저 터널을 지나면 펼쳐질 또 다른 세상, 아침이슬을 머금은 풀잎이 반짝이는 들판. 그곳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살아보고 싶다.

“5년만. 5년만 저곳에서 살다 돌아올게.”

혼잣말을 중얼이며 집으로 향했다. 떠난다는 건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안고 가는 일.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가올 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이 환하다.

“여보, 원하는 곳에 딱 그만한 땅과 집이 있더라. 이사 준비하자.”

순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한 그곳, 마음속으로 수없이 그려왔던 그 풍경이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듯한 목소리가 가만히 내 마음을 두드렸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의 소원을 들으시고,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기도. 떠나야 하는 사람의 기도.

어느덧 해가 머리 위까지 올라와 있다. 떠남이 가까워질수록 이곳의 풍경이 더욱 깊이 새겨진다. 오래도록 함께했던 이 거리, 이 길, 이 강. 모든 것이 내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떠남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삶이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여정이며, 떠남 속에서 새로운 시작이 움튼다.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온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저 먼 곳, 푸른 자연과 맑은 공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나는 떠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떠나면서, 나는 안다. 이곳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숨 쉴 것이며, 언젠가 돌아올 날을 위해 따뜻한 품으로 남아 있을 것임을.

햇살이 다시금 창을 두드린다. 새로운 내일이 열린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정용애 작가의 '떠나는 이의 노래'는 그저 이사의 과정이 아니라, 삶의 한 시점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내면적 노정을 담고 있다. 도심 속에서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뒤돌아보며, 자연과 평온한 삶을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은 작가의 삶의 가치관과 철학을 잘 드러낸다.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떠남과 회귀'의 역설이다. 떠나고 싶다는 열망은 곧 떠날 수밖에 없는 삶의 본질을 상기시키며, 동시에 이곳을 떠나도 결국 기억 속에서 존재하는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떠남 속에서도 삶은 이어진다’는 작가의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또한 작품은 삶과 자연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한다. 홍제천이 흐르고 삼각산이 감싼 도심 속 마을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도시적 삶과 자연이 공존하는 모습을 담아낸다. 이는 단순한 공간의 서술을 넘어, 작가가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 속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서 남편이 “딱 원하는 만큼의 땅과 집이 있다”는 말을 건넬 때, 작가는 이를 현실적 요소를 넘어 ‘삶의 인도하심’을 강조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가장 적절한 곳으로 인도한다는 신앙적 요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의 가치관이 현실을 초월하는 신앙적 확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미적으로도 이 작품은 느림과 멈춤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다. 바쁘게 흘러가는 출근길 도로를 묘사한 초반부에서 정작 화자는 멈춰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과거의 시간을 되짚으며 바람과 대화를 나누듯 자신과의 내적 대화를 시도한다. 이런 정적인 묘사는 역설적으로 화자의 감정적 움직임을 더욱 뚜렷하게 만든다.

요컨대, 정용애 작가의 떠나는 이의 노래는 떠남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과 삶의 연속성을 탐색하며, 인간이 바쁜 일상 속에서도 결국 자연과 평온을 갈망하게 된다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다. 작가의 철학은 삶의 변화 속에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신앙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된다. 떠남의 순간조차도 하나의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독자에게 여운과 함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선물한다.







정용애 작가님께





용애야, 오랜만이제? 요즘 잘 지내고 있냐? 니가 서울서 오래 살았다고 해도 내한테는 영락없는 고향 친구인디, 이렇게 편지로 안부 전하게 되네.

니 글 읽어 봤다. 삼거리 육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 진짜 니답더라. 어째 글 한 줄 한 줄이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보고 느낀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더라. 니가 서울서 바쁘게 살았는디도, 이렇게 동네 골목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 보니, 역시 글쟁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보다야.

그라모 이제 떠난다는 거여? 그 바쁜 서울 살이에서 벗어나서 좀 한가롭고 조용한 데로 가볼라 하는구만. 니가 터널 너머의 푸른 들판을 바라보면서 바람한테 속삭였다 카는 거 보고 내도 가슴이 찡했다야. 니가 늘 ‘나중에 한 번은 자연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하던 게 이제야 이루어지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그라모 니가 가고 싶은 곳이 딱 정해졌는가? 니 남편분이 “딱 그만한 땅과 집이 있다”고 했다카던디, 니 바람대로 조용하고 따뜻한 곳이면 참말로 좋겠네. 하나님이 니 기도를 들어주셨다꼬, 니가 원하는 대로 길을 열어주셨다꼬 하더라. 니 신앙은 변함이 없구마잉. 언제나 니는 그렇게 믿고 기도하고, 결국엔 니가 바라는 대로 살더라.

그란디 용애야, 솔직히 말하면 내는 니가 떠난다카니까 좀 서운하다. 서울이 아무리 바쁘고 복잡해도, 그래도 니가 거기 있으면 언제든 한번 찾아갈 수 있다 싶었는디. 이제 더 멀어지는 거 같아 좀 아쉽구마잉.

근디 말이다, 떠나는 게 끝이 아니라는 거, 니 글에서 느껴진다. 니는 떠나도 이 동네를 잊지 않을 거고, 또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거. 니가 “5년만 살다 돌아올게”라고 바람한테 말한 것처럼, 우리도 기다리고 있을 거다. 니가 서울에 다시 돌아와도, 아니면 고향에 온다 해도, 우린 그대로 니를 반겨줄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라.

니는 늘 새로운 곳에서도 길을 잘 찾아가더라. 서울도 그리 적응했는디, 이번에도 니가 가는 곳에서 또 멋진 글을 써낼 거라고 확신한다. 니 글 한 줄 한 줄에는 세월이 묻어나고, 살아온 흔적이 스며 있더라. 그러니 어디서든 계속 써라. 그리구 꼭 건강해야 한다.

언제 한 번 고향에 내려오면 우리 동무들하고 막걸리 한 잔 하자잉. 니 서울 바쁜 거 다 내려놓고, 우리 동네 바람 냄새도 맡고, 옛날처럼 툭툭 털고 수다 떨자.

용애야, 부디 몸 건강하게 잘 지내라. 어디서든 잘 살고, 행복해야 한다잉.

고향 친구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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