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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삶을 차박하며

김왕식

by 평론가 청람 김왕식 Mar 19. 2025











               길 위의 삶을 차박하며




                                  시인 백영호






우수 ㆍ경칩 다 지난
삼월 중순 어느 밤
남 녘에서 능소화 묘목 400주 싣고
중부로 상경하다가
해 저물어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루의 지친
육신을 누인다
'아이구, 자신아 수고하셨소'
차를 재우고 난 후
내가 나를 재우련다

차창 밖에는
칼날 바람이 겁나게 일고
흰 눈이 대설주의보로 내려
가난한 영혼
아리고 쓰림 죽비를 친다
막내의 잠든 모습과
무사 안녕의 기도 알알이
아내의 입술 가슴에 포개진다

다시 날이 새면
이 한 짐들을
200주씩 분리하여
장소를 달리해서 내리고
다시 새로운 짐을 받으려
길 위에 시간과 시선을
매달아야 하는 일정,
내일은 흰 눈이 그쳤음 하는
기원 가슴으로 올리며
지친 두 눈은 스르르
잠깐 단잠으로 붙인다.






백영호 시인의 '길 위의 삶을 차박하며'는 노동과 생의 무게를 정직하게 담아내며, 길 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철학과 미의식을 드러낸다. 이 시는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해 살아가는 한 노동자의 철학적 성찰이 담긴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길 위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노동을 단순한 생업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능소화 묘목을 싣고 중부로 향하는 여정은 단순한 운송이 아니라, 생명을 나르고 키우는 과정과도 같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시인이 "자신아 수고하셨소"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장면은, 외롭고 고된 삶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노동을 통해 가족을 지탱하고, 이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묵묵히 감내한다. 이러한 태도는 삶을 버거운 짐으로만 여기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성찰적 자세를 반영한다.

더 나아가, 시인의 기도와 가족을 향한 애정은 그의 삶이 단순한 생계를 넘어, 사랑과 책임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막내의 잠든 모습과 아내의 입술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 장면은, 시인이 노동을 통해 가족과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안위를 기원하며 하루를 버텨낸다.

백영호 작가는 일상의 풍경을 시적 언어로 변모시키는 능력을 보여준다. 특히, 차창 밖의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의 미의식이 빛난다. 칼날 같은 바람과 대설주의보 속에서 '가난한 영혼'이 아리고 쓰리다는 표현은, 시인이 자연과 노동 속에서 느끼는 내면적 감각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 노동과 고난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차박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된다는 점에서 현실감이 강하다.

이 시의 가장 큰 미적 특징은 절제된 표현과 여백의 미다. 시인은 화려한 수사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언어로 삶의 본질을 포착한다. "내가 나를 재우련다"는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한, '지친 두 눈은 스르르 / 잠깐 단잠으로 붙인다'는 마지막 구절은, 노동 후의 짧은 휴식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며, 시 전체의 리듬을 부드럽게 마무리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며, 그의 피로와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백영호 시인의 '길 위의 삶을 차박하며'는 노동과 삶을 바라보는 시인의 태도가 집약된 작품이다. 그는 노동을 통해 삶을 견디면서도, 그 속에서 가족을 향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또한, 단순한 일상적 풍경을 시적으로 형상화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를 통해 깊은 울림을 준다. 이 시는 단순한 노동의 기록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한 인간의 철학과 미의식이 집약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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