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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코에서 가을을

EP. 9

by 추설

“네? 뭐… 딱히 다를 건 없네요.
우리 집보단 훨씬 깨끗하긴 해요.”

“이게요?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드라이기는 바닥에 뒹굴고,
잠옷도 널브러져 있었는데요?”

사실, 그렇게까지 깔끔한 편은 아니다.

“그래도요.
저희 집은 거의… 쓰레기장이거든요.
청소할 생각도 없고요.”

“뭐, 깨끗하게 살 것 같진 않았지만…
꽤나 심하긴 한가 보네요.”

“……”
“……….”

큰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이 분위기를 풀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무슨 말을 해도 어설플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그가 먼저 말했다.
“뭐… 술 마시기로 했으니까,
일단 술부터 마실까요?”

“그러죠, 뭐.
전 더는 술 못 마실 줄 알았는데요?”

“말만 그렇게 했지, 저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이에요.”

나는 냉장고를 열어 술을 꺼냈다.
“안주가 없네요. 뭐라도 사 올까요?”

“아뇨, 괜찮아요.
원래 안주 잘 안 먹는 편이라서요.”

“그러다가는 속 썩을걸요?”

그는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미 썩을 대로 썩었는데요.
이젠 좀 무뎌졌어요.”

나는 맥주 캔을 땄다.
“그럼… 우리 짠이나 할까요?”

“그러죠, 뭐.”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딱 그 소리만 남기고, 조용해졌다.

우리는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를 이어갔다.
별 의미 없는 말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루하지 않고 재밌었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말을 꺼내버렸다.
“그쪽은… 연애 같은 건 안 해봤어요?”

말을 마친 뒤, 괜히 시선을 피했다.
“지금은… 당연히 안 할 것 같고.”그는 잔을 만지작거리다, 입꼬리를 작게 올렸다.
“… 저를 무슨, 감정 없는 바보쯤으로 생각하시나요?”

“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 그려지지가 않아서요.
그쪽이 연애를 한다는 게.”

잠깐 멈췄다가, 말을 덧붙였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예쁘게 말하는 거,
그쪽이 그럴 거라고는 상상이 잘 안 돼요.”

그는 손에 든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예쁘게 말했다고는 안 했어요.
연애는 많이 해봤죠.
재미는… 없었고요.”

나는, 조금 놀랐던 것 같다.
도무지 연애라는 단어가 그 사람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네?
그쪽이 연애를 많이 해봤다고요?
몇 번이 나요?”

그는 캔을 살짝 흔들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해봤는데요.”

“거짓말.”

“진짜예요.
다 기억 못 할 뿐이지.
말했잖아요. 재미없었다고.”

재미가 없었다는 말.
장난처럼 들렸는데, 어딘가 마음이 저릿했다.

“… 혹시, 그 재미가 없었다는 건… 무슨 의미예요?”

그는 한참 말이 없다가, 맥주캔을 책상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냥, 재미없었다는 거예요.
말 그대로.
그래서 기억도 없고요.”

나는 말없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별일 아닌 듯 넘기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마음에 남았다.

“음… 그렇군요.
정말, 재미로 사는 분이네요.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예요?”

그는 곧장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일걸요.
재미없는 일, 굳이 할 필요 있나요?”

맥주캔 옆면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렀다.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연애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재미가 있어야, 누굴 만나든, 그럴 이유가 생기니까요.”

“… 그렇군요.”

내 말이 끝나자, 그가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그쪽은요?”

“네?”

“연애요.
그쪽은 안 해봤죠?
솔직히 상상이 안 가요.
차갑고, 까다롭고… 그냥, 딱 냉혈인 스타일.”

그 말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기요.
제가 그렇게 보여요?
그쪽이 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제 아주 잘 알겠네요.”

“보이는 대로 말한 거예요. 그래서요. 해봤어요?”




'모지코에서 가을을'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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