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그는 잠시 멈춰 뒤돌아본 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 후우…”
짧은 숨소리 뒤에,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불편할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역시 자기 집이 제일 편하겠죠. 미안해요, 괜히 붙잡아서.”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말끝이 흐려졌다. 답답함에 내가 먼저 물었다.
“왜요? 무슨 말 하고 싶은데요?”
그는 한참을 머뭇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냥...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여자 집에 이렇게 와 본 것도 처음이고, 뭐랄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살짝 웃었다.
뭘 어떻게 해요. 잘만 있었으면서. 일단 씻고 와요. 씻고 와서, 남은 맥주나 마저 마시자고요. 아직 많아요.”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또 술이요…? 대단하시네요, 정말. 근데 입을 옷도 없고… 욕실 써도 돼요?”
“그쪽은 남자치고 마른 편이니까, 제 옷이 그렇게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편한 거 줄게요. 욕실은… 그냥 써요. 문 그쪽이에요.”
“아… 네. 그럼, 실례 좀 할게요.”
그는 욕실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나는 무심히 말을 덧붙였다.
“저기요. 수건이랑 옷은요?”
조금 있다가 문이 다시 살짝 열렸다.
그가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아… 그러네요. 말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조용히 수건과 옷을 건넸고, 그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곧 욕실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기 너머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식탁에 앉아, 남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김 빠진 맛.
입안에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는 쓴 기운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우중충했을 풍경인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빗방울이 창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는 모습이,
어디론가 마음이 옮겨가는 것 같아서.
‘어쩌다가, 이런 상황까지… 내가 미쳤나.’
내가 생각해도 웃겼다. 이 상황을 만든 건 나였고,
그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도… 나였으니까.
그 생각이 끝날 무렵,
창에 흐르던 빗방울에서 시선을 떼게 됐다. 현실이 조용히 어깨를 건드렸다.
이제, 어떡하지. 술 마시고 그냥 자는 건가. 어디서 재우지.
남은 이불이 있었나. 자고 가라고 해놓고,
정작 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좀 웃기잖아…?
아니, 그보다 베개가 하나뿐이지 않았나…?
그 사람, 아무래도 불편할지도… 나도 마찬가지고…
머릿속이 조용히 어수선해졌다.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없는데,
속으론 이런 생각만 계속 반복됐다.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따뜻한 김이 먼저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걸어 나왔다.
비를 맞았던 공원에서처럼,
머리카락 끝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내 흰색 무지 반팔티에, 분홍색 수면 바지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 쪽엔 작고 귀여운 고양이 프린트.
나는 그걸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행이에요. 작진 않네요.”
장난처럼 덧붙였다.
“근데… 아까랑 다르게, 바지가 좀 귀여워지셨네요?” 그는 멈칫하더니, 수건을 내렸다.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아까는 당황해서 못 봤는데…”
눈을 피하며 혼잣말처럼 이어갔다.
“꽤나… 어울리지 않으시게 귀여운 잠옷을 가지고 계시네요. 후…”
나는 고양이 프린트를 가리켰다.
“미안한데, 저도 여자거든요?
좋네요. 고양이 좋아하시잖아요.
분홍색에 귀여운 고양이… 찍어도 돼요?”
그는 헛웃음을 흘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아, 정말. 왜 이러세요.”
그 말투가 괜히 듣기 좋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진짜로 웃기다기보단, 뭔가 오랜만에, 기분이 느슨해진 느낌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고 할까.
부서진 건 아닌데, 어딘가 아주 살짝 금이 간 듯한 그런.
나는 장난스럽게 다시 말을 꺼냈다.
“왜요. 그러지 말고 한 장만.
이런 것도 인연이잖아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는 척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러세요.
그쪽 말대로, 인연이고 뭐고…
보답까진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해주신 분한텐 뭐, 이 정도쯤은 성의라고 생각할게요.”
“와… 진짜 찍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냥 한 말이었는데, 그럼… 찍을게요?”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었다.
셔터 소리가 몇 번 울렸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식탁 아래로 몸을 낮췄다.
“참나, 이미 다 찍혔거든요?
사진은 그렇게 많이 찍더니, 정작 본인은 찍히는 거엔 약하시네요.
부끄러우신가 봐요?”
그는 테이블 가장자리 쪽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후...
저는 제가 찍히는 건 좀… 부끄러워서요. 되도록이면… 지워주시죠.”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가슴쪽으로 끌어안았다.
“제가요? 왜요, 싫은데요.
평생 간직할 건데요?”
그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채, 숨을 내쉬듯 말했다.
“하… 참. 정말… 뭐, 알겠어요.
대신, 아무한테나 보내진 말아요.”
나는 장난기를 감추지 못했다.
“그쪽이 뭐가 예뻐서요. 그쪽이 남한테 보여줄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을, 정말 곱게는 못하시네요.”
“그 말, 돌려드릴게요.
누가 할 소리인데요?”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티격태격하다가,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곧 조용해졌다. 서로 현실을 인식한 듯, 어색한 공기가 천천히 퍼졌다.
잠시 머뭇거리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때요?여자 집에 오니까?”
그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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