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0
사진 한 장으로 실랑이를 마무리 짓고 나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좀 걸을까요.
가만히 서 있다간 또 사진 찍자고 할까 봐 무섭네요.”
그녀는 웃으며 발을 내디뎠다.
“여기까지 와서 사진 안 찍으면 뭐 하려고요?
남는 건 결국 사진이라잖아요.
이 근처, 유명한 포토 스폿이 꽤 많다던데요.”
모지코역을 등지고 몇 걸음 걷자,
붉은 벽돌 건물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이 묻은 창틀과 녹슨 난간,
햇살을 머금은 유리창 사이로
손질되지 않은 듯한 풍경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 거리를 걷는 일은 낯설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문득 발끝에 밟히는 기분이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쪽이 잠깐 식어가는,
그런 종류의 익숙함이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변을 담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그 옆을 걸었다.
“오늘은 한산해서 좋네요.
사람이 많았으면, 조금 실망했을지도 몰라요.”
“그러게요.
이렇게 조용할 줄은 몰랐어요. 운이 좋은가 봐요.”
“사실은 그걸 노리고 평일로 잡은 거예요.”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모지코 거리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조용한 골목 어귀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배를 감싸며 얼굴을 붉혔다.
“… 들렸죠.”
“네. 아주 또렷하게요.”
“아, 진짜. 왜 꼭 이럴 때만 이래요.”
“딱 좋은 타이밍이에요.
슬슬 뭐라도 먹어야 할 시간이었거든요.”
그녀는 민망함을 숨기듯 웃었다.
“저도 그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배고플 때는 생각도 닮아가나 봐요.”
“여긴 처음이라 잘 몰라요.
맛집이든 뭐든, 그쪽씨가 책임지고 데려가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건물을 가리켰다.
“조금만 더 가면 괜찮은 곳이 있어요.
오래된 건물 꼭대기에 있는 조용한 식당인데,
전망이 좋아요. 아직 있다면요.”
“그런 데 너무 좋아요.
지금 딱, 그런 데 가고 싶은 기분이에요.”
“근데, 식당 정하는 건 원래 그쪽 담당 아니었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투 좀 고쳐요.
매번 말끝마다 뾰족하게 굴잖아요.
그리고… ‘그쪽’ 말고, 혜은이라고요. 이. 혜. 은.”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좀처럼 웃지 않는 내가,
이상하게 자꾸 웃게 된다.
귀찮은데도… 묘하게 재미있는 여자였다.
이제는 지쳤는지, 그녀가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그쪽씨.
우리 진짜 식당 가는 거 맞아요?
바로 앞이라더니 꽤 걷는 것 같은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네? 뭐라고요? 그쪽씨요? 하… 참을성이 없나 봐요.
이제 다 왔어요.”
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네. 그. 쪽. 씨. 참을성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름도 안 알려줬잖아요. 그전까진 계속 그쪽씨예요.”
나는 건물 꼭대기를 가리켰다.
“예예. 다 왔습니다. 바로 저기, 7층.”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전망 좋겠네요! 저기서 밖에 보면 예쁘겠어요.”
나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예전에 한 번 들렀던 그 식당이었다.
잊고 싶었던 감정까지 함께 떠오르는 곳.
“올라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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