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
“저기요… 택시 타실 건가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대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나는 곧장 말을 이었다.
“집이 가까워서요.
잠깐 몸이라도 녹이고 가는 게 어떨까 싶어서요.”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새 부끄러워져 황급히 덧붙였다.
“아! 절대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오해 말아요.
정말 그냥, 따뜻한 데서 잠깐만...
몸만 녹이고 가시라고요. 몸. 만.”
그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짧은 정적 끝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다른 사람 집에서 자본 적 없어요.
그리고... 모르는 사람을 집에 그렇게 들이셔도 되는 거예요?”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쪽이라면 그럴 법하죠.
근데요, 우리 꽤 자주 마주쳤잖아요.
모르는 사람까진 아니죠.”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요, 자고 가라고 한 거 아니에요.
몸만 녹이고 가라고요. 정말, 몸만.”
그는 여전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아니… 진짜 괜찮아요.
앞에 편의점 가서 우산 사면 되니까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는 숨을 짧게 내쉬고, 단호하게 잘랐다.
“됐고요. 따라와요.
그렇게 젖어서 거기까지 어떻게 갈 건데요.
택시도 안 탈 거잖아요, 그쪽은?”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네. 알았어요. 독불장군이시네요.”
나는 작게 웃었다.
“하여간, 꼭 그렇게 말을 밉게 해요.”
“아… 네. 맘대로 생각하시죠.”
“휴, 일단 가요. 비가 약해질 기미도 없고.”
“네.”
우리는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비는 여전히 잔잔히 내렸고, 어두운 골목을 따라
원룸 건물 1층 현관에 도착했을 무렵,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 본인 얼굴 엄청 웃긴 거 알아요? 막 씻긴 고양이 같아요.”
그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하… 미안한데, 그쪽은 더하거든요. 물에 빠진 생쥐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활의 온기가 남아 있는 조용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 옆 작은 공간엔 침대가 놓여 있었고, 전등 불빛이 벽면을 따라 부드럽게 퍼졌다.
한눈에 들어오는 1.5룸. 익숙한 나의 공간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두며 말했다.
“집이 좀 좁죠? 그냥 혼자 사는 직장인 방이에요. 별거 없고요.”
그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집보다 넓은데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네요.”
나는 옷장 앞에서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젖은 거 너무 신경 쓰지 말고요. 저기 앉아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자, 수건을 건넸다.
“괜찮아요.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수건을 받은 그는 조용히 머리를 닦은 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아… 네. 그보다 고맙네요. 낯선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우리 꽤 자주 봤던 사이라고.
그리고, 고마운 건 저예요. 오늘 시간 내줘서. 솔직히 귀찮았을 텐데.”
그는 어깨를 한 번 움찔이며 말했다.
“귀찮았던 건 사실이긴 한데… 나쁘진 않았어요.
사람이랑 이렇게 이야기한 게, 정말 오랜만이라서요.”
오랜만이라니.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마냥 좋지만도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마음이 쓰였다.
“나쁘진 않았다니,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보다…”
말을 꺼내다 말고, 나는 잠깐 멈췄다.
그가 먼저 반응했다.
“네? 왜 말하다 말아요. 그냥 편하게 말해요.”
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게요… 사람하고 이야기하는 게 오랜만이라는 말, 프리랜서라 그런 건가요?
아니면, 그냥…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건지.”
그는 짧게 숨을 내쉰 뒤, 담담하게 대답했다.
“둘 다예요.
일하면서 누구 만날 일도 없고,
관계는 제가 끊었고요.”
한 박자 쉬고는 말을 이었다.
“공원에서도 말했잖아요.
별로인 사람이 많았어요.
짜증 나고, 귀찮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먼저 말 거는 성격도 아니고요.
아니면 내가 별로인 사람일 수도.”
그의 말투는 달라진 게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문장이 오래 남았다.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하나는 그의 앞에, 하나는 내 자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미안해요. 집에 이런 것밖에 없어요. 근데… 친구 같은 건 아예 없어요?”
그는 캔을 따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있을 리가요.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그런 타입으로 보여요?”
그리고 짧게 한숨을 쉬듯 말했다.
“그보다 또 술이네요. 으윽.”
여전히 그의 말엔 단정한 선이 있었지만,
그 어조가 오히려 이상하게 마음을 놓이게 했다.
나는 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럴 리 없죠. 절대 친구 많아 보이진 않으니까요. 걱정 마요.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아까 술집에서 짠 한 번도 안 했더라고요. 이쯤에서 한번 해줘야죠.”
그는 캔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 그거 참 듣기 좋네요. 친구 없어 보이는 타입.
그래요, 짠이나 하죠.”
짠—
그와 나는 오늘 처음으로 잔을 맞댔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저랑 친구할래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뇨. 전 친구 같은 거 안 만들어요.
우정이니 뭐니, 그런 말 들으면 좀 답답하거든요.”
예상한 대답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은 상하지 않았다.
그저,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련하시겠어요. 아웃사이더, 딱 그 느낌.”
그는 어깨를 가볍게 움직이며 말했다.
“음, 그런 느낌이죠.”
나는 맥주 캔을 내려두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 기가 막히네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기분 나쁘다거나…”
그는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히 대답했다.
“네? 맞는 말인데요.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어요.”
나는 시선을 떨군 채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맥주 캔을 조용히 내려두고 말했다.
“그보다… 비도 거의 그쳤네요. 이만 가볼게요. 고마웠어요.”
말은 조용했지만, 그 뒤로 남겨지는 여운은 묘하게 컸다.
조금 더 이어질 줄 알았던 대화가 너무 쉽게 닫혀버린 것 같았다.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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