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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코에서 가을을

EP. 5

by 추설

나는 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저요? 그냥… 사무직이에요.”

“사무직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종류가 있지 않아요?”

나는 피식 웃었다.
“사무직도 모른다는 사람은 처음 봐요.
그냥 컴퓨터 앞에서 숫자 정리하는 거예요.
회계 쪽이에요. 회사 돈 관리하고, 월급 계산하고… 그런 일.”

그는 조용히 말했다.
“충분히 훌륭한 일이네요.
‘평범한 일’이란 건, 사실 없는 거잖아요.
누군가에겐 흔해도, 다른 누군가에겐 특별할 수도 있으니까.
저한텐 그게 좀… 낯설고 멀어요.”

나는 웃었다.
캔을 손 안에서 천천히 굴리며 말했다.
“감동적이네요.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조금… 다시 보게 되는데요.”

그가 작게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정말.”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금, 부끄러운 거예요?”

그는 바로 받아쳤다.
“뭘요. 부끄럽긴.
그보다 술 다 마셨잖아요.
슬슬 일어나죠. 시간도 늦었고.”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43분인데요? 이게 늦은 시간이에요?”

그도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잠깐 바라봤다.
입을 열며 조용히 말했다.
“아뇨. 내 기준에도… 아직 이른 편이죠.
그렇다고 또 술 마시러 가기엔 좀 피곤하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금요일이에요.
회사원한텐 이상하게 힘이 남는 날이거든요.”

그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제 의견은 안 중요하다는 거네요.”

“정답이에요. 일어나요. 술도 좀 깬 것 같고.”

우리는 말없이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볼에 차가운 감촉이 스쳤다.
나는 무심코 손바닥을 펼쳐, 하늘 쪽으로 올려보였다.
“…비네요.”

그도 고개를 약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게요. 방금까진 별이 보였는데… 아, 위성이었죠.
어쨌든 갑자기 무슨 비가…”

우리는 그대로 서 있었다.
우산을 꺼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작은 물방울이 머리카락과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비도 오는데, 어쩌죠?”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음… 내가 우산을 사올까요. 아니면 그냥 귀가해도 괜찮고요.”

내 가방 안에는 우산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귀가하기엔 좀 아쉽지 않아요?”

그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럼, 사러 가죠. 그렇게까지 놀고 싶다니, 직장인이라는 존재… 신기하네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졌다.
―촤악.
순식간에 굵어진 빗줄기.

말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뭐야, 갑자기!”
“이쪽으로요!”

나는 그를 따라 공원 안쪽 정자로 뛰어들었다.
낡은 지붕 아래, 두 사람의 숨이 고르게 섞였다.
그는 소매로 얼굴의 빗물을 훔쳤다.
셔츠는 이미 젖어 있었고, 얇은 천 너머로 그의 흰 피부가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를 바라보았다.
젖은 옷, 흘러내리는 물방울, 낮은 숨소리.
시선이 자연스럽게 멈췄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그때,
그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들킨 느낌이었다.
나는 얼른 눈길을 피했다.
“…비, 생각보다 많이 오네요.”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조용히 웃었다.
“그러게요.
지금은 어디 가기도 애매하죠.
이 정도면... 그냥, 여기 있어도 되겠네요.”

“그러게요…
이젠 뭐,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쏟아지는 빗소리만을 들으며
조용히 자리에 머물렀다.

잠시 뒤, 그가 작게 기침을 했다.
깊고, 젖은 숨이 섞인 소리였다.

나는 옆을 보며 물었다.
“저기요… 혹시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그는 연달아 두세 번 기침한 뒤, 숨을 고르고 말했다.
“괜찮아요. 감기는 아닐 거예요.
원래 자주 이래요. 잔기침이에요 그냥.”

나는 조금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다행이네요. 그런데…
비가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네요.
집은… 어디세요?”

그는 쏟아지는 정자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 너머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전 집이 꽤 가까워요.
걸어서... 40분쯤?”

나는 말을 멈추고, 그를 다시 보았다.
“…걸어서 40분이요?”

“이 근처 사는 줄 알았는데요.
이 동네 꽤 자주 있지 않았어요?”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40분이면 가까운 거죠. 원래 걷는 거 좋아해요.
아니, 좋아한다기보단... 그냥, 그런 거라도 해야 하는 거죠. 심심하니까.”

나는 짧게 웃었다.
“역시… 특이해요. 참, 특이해요.
그래도 그 얇은 셔츠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옷인데요.”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웃었다.
“괜찮아요.
하늘에서 옷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요.”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표지.jpg '모지코에서 가을을'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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