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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코에서 가을을

EP. 3

by 추설


그는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애매한 어조로 말했다.
“가끔이요. 진짜... 아주 가끔. 하지만 뭐, 반응은 거의 안 좋죠.”

말투는 담담했지만, 어딘가 무게가 느껴졌다.
나는 손에 든 소주잔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말했다.
“됐어요. 누군가는 하고 싶어도 못해요. 그쪽은 적어도 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의 잔에 술을 조금 따라줬다.
“나중에 잘되면, 저한테 사인이나 해주세요.”

그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나에게 돌렸다.
“나중에요...? 뭐, 그런 게 있다면 그러죠.”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잘될 수 있죠. 왜 자꾸 그렇게 말해요. 하여간…”

그 후 대단한 이야기는 없었다. 헛소리 같은 농담, 대답인지 모를 말들. 그리고 때때로, 아무 말도 없이 서로의 잔이 비어 있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시간이 제법 흐르고, 술집 안에는 이제 우리 둘만 남아 있었다. 적당한 정적이, 오히려 편안했다.
“나갈까요.”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생각보다 바람이 차가웠다. 마신 술이,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말없이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까 지나왔던 공원 쪽이었다.
“잠깐, 앉았다 갈래요?”
그가 갑작스럽게 말을 건넸다.
“네? 왜요…?”
나는 시선을 앞에 둔 채, 대답했다.
“그냥요. 그쪽이 궁금해서요. 어차피 집에 갈 마음 없잖아요.”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뭐, 그러죠.”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을 샀다. 공원 벤치에 앉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캔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기대듯 앉아,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손끝의 캔은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맥주를 열어 그의 쪽으로 건넸다.
“저기요. 그쪽은 고민 같은 거 없어요? 결국 프리랜서라는 건데... 수입이라든가.”
그는 캔을 받아들며 웃었다.
“있죠. 고민거리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조용히 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 뒤, 시선을 멀리 둔 채 말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되게 직업, 돈 얘기 많이 하시네요.”

나는 순간, 그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그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무슨 고민이에요? 고민은... 내가 아니라, 그쪽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나는 조용히 웃었다.
“티가 나나 봐요. 말하면 뭐, 들어줄 건가요?”

그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꼬리는 여전히,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뭐, 말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잖아요?
말해봐요.
오늘, 오랜만에... 꽤 재밌는 시간이었으니까.
고민 정도는 들어줄게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거 참 고맙네요.
재밌었다니까.”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냥... 별거 없어요.
남들 다 하는 고민이에요.”

그는 말없이 기다렸다.
“…사는 게 힘들어서요.”

그도 캔을 들었다.
묵묵히 한 모금 신 뒤, 천천히 말했다.

"그럴 수 있죠.
뭐가 그렇게 힘든데요?
역시... 돈인가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죠.
형편은 빠듯하고, 혼자 사는 건 익숙해지질 않고.
직장 일은 늘 벽 같고, 월급은... 늘 모자라고.
쳇바퀴 같은 삶. 그렇네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힘드시겠어요.
전 직장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가 거기서 말을 멈추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끝이에요?
설마, 그게 위로예요?"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 미안해요.
누굴 위로해 본 적이 없어서요."

나는 캔에 남은 맥주를 마시며 웃었다.
"괜찮아요.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그런 말이... 위로가 되긴 하네요."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나는 손에 들린 빈 캔을 굴리며, 말을 던졌다.
"사실, 저... 부모님도 안 계세요.
그래서 어디 말할 곳도 없어요. 그냥... 부모님한테 투덜거리는, 뭐 그런 거요."

그는 바로 대답했다.
"그건 괜찮아요. 저도 없어요. 부모님은."

그 말이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괜히 얘기를 꺼낸 걸까요?
너무 무거운 얘기였죠?"

그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니요.
부모님이 없다는 게 무거운 얘기인가요?"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그는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네? 뭐가요?
뭐... 고민한다고 부모님이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부모님이 없는 게... 원망스러운 거예요?
아니면, 지금 힘드니까 그 생각까지 미치는 거고?"

말문이 막혔다.
무심한 말투인데, 부모님이 없다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그가 이상하게 불쌍해 보이면서도
나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렇네요.
그쪽, 뭐 사진가인지 예술가인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사람 마음 잘 읽네요."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됐어요. 거창한 말 들으려고 말한 거 아니니까요."

나는 뭔가에 끌리듯 그를 바라봤다.
빈 캔을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그때 그가 꽤나 시끄러운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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