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아닌데요, 소고기를 그만 먹고 싶어요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라는 말이 있다.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고,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라는 고깃집에 붙어있는 센스 있는 문구에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고기는 비싼 편에 속하는 음식이다. 점심시간에 순댓국이나 김치찌개 먹으러 가자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간단히 한우나 먹으러 가자.' 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은가. 물론 법카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그런지 소고기 외식은 특별한 날일 때 먹는다는 인식이 강했다. 취업을 했을 때나 보너스를 받았을 때 등의 나름의 대소사가 있어야 먹곤 했다. 소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돼지고기나 닭고기만 많이 먹어 버릇해서인지 입맛이 저렴한 편인지 소고기를 그다지 즐기진 않아 왔다.
소, 돼지, 닭, 오리, 양 중 무슨 고기가 제일 좋냐는 질문에 1위의 영광을 차지하는 건 닭 아니면 돼지다. 소는 운 좋으면 3위권, 오리 고기나 양고기에 밀릴 때도 많았다. 어린 시절에 생일날 외식 단골메뉴는 돼지갈비나 치킨이었고, 성인이 되어도 그 취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3개월 동안 힘겹게 모은 두 개의 배아를 이식했다. 1년 반의 시간이 흘렀고, 이번이 세 번째 배아이식이었다. 휴직 기간 만료가 다가온다. 그전에 성공해야 했다. 절실했다. 차가운 성질의 돼지고기보다는 소고기가 착상에 좋다고 했다. 이 밖에도 포도, 추어탕 등 여러 음식이 있었지만, 마트에 널려 있는 소고기가 비싸긴 해도 가장 익숙한 음식이었다.
평소에 구운 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 이상하게 구운 고기는 수분이 날아가서 그런지 먹고 나면 소화가 되지 않았다. 고기는 굽고, 씹어야 제맛이라지만, 구운 고기를 먹고 나면 여지없이 소화제를 찾곤 했다. 고기 종류는 상관이 없이 구운 고기는 영 몸에서 받질 않았다.
고기는 센 불에 화르륵 구워야 맛있다는데... 굽는 게 아니라 육즙이 뚝뚝 빠져나오게 약한 불에 찌는 듯 구워 남편에게 여러 번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고기도 역시 먹어본 사람이 먹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보쌈이나 갈비찜, 갈비탕, 미역국, 샤부샤부 등 물에 빠진 고기를 주로 먹게 되었다. 이번에는 소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비싼 소고기를 물에 빠뜨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어찌 먹어야 맛있을까 고심했다.
인터넷에 몇 번 검색을 하니 '착상죽'이 나왔다. 착상에 좋은 재료인 소고기, 전복과 각종 야채 등을 넣고 끓여 착상에도, 소화에도 좋다고 했다. 시도해 볼까 생각했지만 몇 년 전, 전복을 솔로 박박 긁어대며 손질하다 멘탈도 손도 탈탈 털린 경험이 떠올라 되려 몸서리가 쳐졌다.
갈비찜은 너무 당분이 많을 것 같고, 보쌈은 돼지고기고, 미역국은 썩 내키질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갈비탕이었다. 가장 건강할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갈비탕도 몇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핏물을 빼고, 오래 끓여야 하며, 기름도 걷어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사 먹는 게 나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정성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배아 이식 전날에 끓이기 위해 한가득 장을 봤다. 하지만, 시댁 가족 행사가 있다는 연락을 받곤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이식 당일에는 점심도 지하철 의자에 앉아 대충 계란을 먹을 정도로 바빴다. 배아 이식 후에는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한다기에 해야 할 일들을 몽땅 미리 처리하는 바람에 병원도 늦을 뻔했다.
지난 두 번의 이식으로 배운 게 있다면, 이식 날은 재수가 없다. 이식 후에도 재수가 없다. 자꾸 생각지 못한 일들이 생기니 불안함에 덜덜 떨며 순서를 기다렸다. 호르몬의 여파 때문인지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생리 현상에 잡생각이 잊혔다.
배아 이식 때 힘든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 다름 아닌 소변을 참는 것이다. 2시간 동안 참아야 한다. 빨리 끝나고 화장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가고,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며 이식은 끝났다.
집에 오니 저녁이 되었다. 갈비탕을 끓일 정신도 없고, 포도와 딸기 등 착상에 좋다는 과일만 간신히 사 왔다. 배달 앱을 켜서 고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비비고 도가니탕을 꺼냈다. 일단 한 끼를 때워야 한다. 이러려고 사다둔 건 아닌데 만사가 귀찮았다. 도가니탕도 단백질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를 하며 해치우듯 식사를 해결했다.
그다음 날은 갈비탕을 끓여 먹었다. 무조건 누워있으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일상생활 정도에 포함된다며, 바삐 움직였다. 무거운 냄비를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니 힘이 들었다. 다음날은 남편이 소고기 안심을 사 왔다. 그것도 잔뜩, 늦은 퇴근에 손에 들고 돌아온 소고기가 전리품인 듯 남편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안심을 더 좋아하니까 사 왔어. 최대한 얼리지 말고, 열심히 먹어봐."
처음엔 구워 먹었다. 그다음 날은 볶아 먹었다. 또 다음날은 에어프라이기에 돌려도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소고기는 줄지 않았다. 5일 연속 소고기를 먹고,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아 닭고기로 전향했다. 토요일 하루쯤은 치킨을 먹어도 되겠지. 소고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싫어하지도 않았다. 평소에 자주 먹지도 못하는 소고기를 원 없이 먹고 있는데 그만 먹고 싶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닭고기에 정신 팔렸던 하루가 지나고, 방치해 둔 소고기의 색깔은 선홍빛이 아닌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었다. 사다 둔 지 4일 정도 지났을까. 마트에서 산 고기는 냉장고에만 두면 5일도 쌩쌩했던 거 같은데... 정육점 고기는 왜 벌써 색이 이럴까 생각했지만, 진공팩 포장이 아니어서 그런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설마, 상하진 않았겠지. 평소에는 손이 덜덜 떨려 한우 대신 호주산을 카트에 넣는데 이건 무려 한우 소고기 안심이었다. 색깔이 약간 탁해졌지만 문제는 없을 것이다. 짜파게티 소스를 넣고 볶아먹으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한 입 먹는 순간, 이상했다. 평소 입맛이 예민한 편이다. 상한 음식이나 돼지고기를 먹을 때도 수퇘지 고기면 냄새와 맛으로 귀신같이 잡아낸다. 그래서 친정 엄마는 나에게 종종 음식들을 먹이며, "어때? 상했어?" 물어보곤 했다.
'소고기에서 왜 신맛이 나지?' 내 입맛이 틀릴 리 없다. 이건 상했다. 짜파게티 소스가 덮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직 냉장고에 이런 고기가 몇 덩이나 더 있는데... 다 버려야 한다고? 이 비싼 소고기를! 역시 뭐든 얼리는 게 특기인데 이번에는 얼리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한참 망설이다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직행했다. 아쉬웠으나 남은 고기도 다 버렸다. 괜히 이 상황에 탈이 나면 더 문제였다. 고기의 상태를 몸이 증명이라도 하듯 화장실을 몇 번 오갔다.
착상이 잘 된다는 소고기, 열심히 먹었다. 상한 소고기도 아까운 마음에 몇 점 먹었다. 득이 아닌 실이 되었으려나. 착상에 도움이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고, 스트레스만 잔뜩 받았다. 번거로워도 차라리 착상죽을 만들걸 그랬나. 죽이라 소화라도 잘 되었을 텐데... 후회하긴 이미 늦었다.
초등학교 때의 급식 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들은 매일 순번을 돌아가며 잔반 버리는 통 앞에 서서 아이들의 식판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그 앞에서 남겨둔 먹기 싫은 반찬을 울며 겨자 먹기로 먹기도 했다. 나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
'착상에는 소고기, 남기면 안 돼. 다 먹어야 해.' 무언의 목소리가 들려와 강요받는 느낌이 들었던 건 기분 탓일까. 이제 더 이상 잔반 통 앞 선생님도 없고, 검사를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도 아니지만 왜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다.
비싼 소고기가 질려버렸다. 당분간은 미역국에 고명처럼 나오는 양이여도 만나기 싫을 정도로. 소고기가 질렸다고 말하니 왠지 엄청난 부자라도 된 것 같지만, 상한 고기를 버리면서도 벌벌 떠는 한낱 소시민의 푸념이려나.
뭘 먹어야 임신이 될까. 마트에서 청포도를 집어 카트에 넣었다. '호주산 어텀크리스피 청포도' 너도 호주산? 포도를 보는데 소고기가 생각나는 건 같은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겠지? 그래, 이거라도 먹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