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빨리빨리'라고들 한다. 나도 그야말로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사는 걸 보니 뼛속까지 '참'한국인이 틀림없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일도, 집안일도 할 일이 많아 그런 줄 알았는데 일을 쉬고 있으면서도 입에 붙은 빨리빨리는 여전했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지만, 쫓기듯 바쁜 현대인이었다.
식당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잘 견디지 못한다. 오늘 시키면 내일 새벽에 도착하는 각종 배송 서비스와 배달의 민족의 익숙해진 삶을 살아서일까. 기다림이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활과 1년 반 전에 시작한 '난임'의 삶은 정반대이다. 기다림의 연속이다. 생리를 기다리고, 난자채취를 기다리고, 배아이식을 기다린다. 병원에서 의사의 진료와 각종 검사를 위한 대기시간은 기약조차 없어 기다림에 지쳐 쓰러질 것 같다.
'띵동', 문자가 도착했다. 'OOO님의 배양 결과는 3일 배양 배아 1개입니다.' 다시 위로 올라가서 읽어봐도 문구는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다. 시댁 제사에 불참하고, 명절을 병원에서 보냈다. 일찍 자고, 비싼 주사를 맞았던 결과가 이거였나 싶은 생각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 내 몸뚱이는 그대로인데 몇 달 사이 엄청난 변화라도 기대했던 걸까.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3일 배양이 5일 배양이 되는 마법을 기대했나 보다. 해가 바뀌고 병원도, 약도, 생활 습관도 바꿨지만, 결과는 작년과 똑같은 3일 배양 1개, 역시 '될놈될'인가 싶은 마음에 깊은 화가 단전에서부터 끓어올랐다.
슬프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이미 5일 배양 2개가 목표라던 의사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5일 배양이 아니더라도 배아 2개가 모이면 이식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다. 의사는 어쨌든 2개가 모이면 이식을 한다고 했었다.
4일 배양, 3일 배양 1개씩 2개의 배아를 모았다. 배양 결과 문자가 왔다는 것은 난자 채취한 뒤 열흘이 지났다는 것이고, 2~3일 뒤면 곧 생리가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슬퍼할 여유 따위 없었다. 다시 병원을 찾아 배아 이식을 위한 레이스를 시작해야 했다.
자궁 내막을 두껍게 해 준다는 '페마라'를 왠지 전투적으로 먹으며, 마음을 다 잡았다. 5일 후 다시 병원을 찾았지만, 이번에 자궁 내막이 천천히 두꺼워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병원을 찾았지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내 자궁 내막만큼은 유난히 천천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자 채취할 때보다 더 병원을 자주 갔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의사에게 물었다.
"이번 주기에 과연 배아이식을 할 수 있을까요?"
의사는 이번 주기 진행이 유난히 늦어지는 것 같다면서 다음 주에 한번 더 초음파를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늦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식은 할 수 있을 확률이 더 높다며 희망적인 말도 덧붙였다.
지난번 난포도 유난히 천천히 자랐는데 이번 주기도 평균의 속도보다 느려 병원에 갈 일이 더 많아졌다. 오고 가는 시간과 병원 대기 시간에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쯤, 드디어 배아 이식 날짜가 잡혔다. 배아 이식을 준비하기 시작한 뒤 약 한 달 뒤에 잡힌 날짜였다.
최근에 그나마 생리주기가 좀 평균(28일)으로 돌아왔다 했건만 다시 예전처럼 한 달 반이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일정도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다. 유난히 느린 진행 속도를 가만히 지켜볼 만큼 참을성이 대단하지 못하다. 급한 마음에 조바심만 생긴다.
유난히 천천히 자라고 있는 자궁 내막에게도 '빨리빨리'를 주문하고 있는 날 보며, 몸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어주고 있는데 마음은 눈치 없이 조급해만 하고 있는 건가. 기다리면 결국 준비는 될 텐데 말이다.
마침 책을 여러 권 주문할 일이 생겼다. 여러 책을 고민하다 베스트셀러의 꽤 오래 머물렀던 '메리골드 마음세탁소'를 골랐다. 검색해 보니, 메리골드의 꽃말이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란다. 예전에 어느 드라마에서 얼핏 들어봤던 것 같기도 하다. 아파트 화단과 여러 공원에 꽃을 보며 메리골드를 떠올린다.
이런 곳에 메리골드는 없겠지. 꽃집에나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꽃인가.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 역시 쉽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리라. 아직 주문한 책은 바쁘다는 이유로 펼쳐보지도 않았다. 유난히 예뻤던 표지와 꽃말만 마음속에 깊이 새긴다. '빨리빨리'는 잠시 넣어두고, 느리더라도 결국 오고야 말 행복을 기다린다.
- 사진출처 : MBC <나 혼자 산다> 33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