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10만 원인 그 주사를 또 맞았다
장 보는 걸 좋아해 집 앞 마트를 참새방앗간처럼 드나들곤 한다. 어제 동물복지 계란 한 판을 평소보다 싸게 팔기에 구입했다. 오늘 마트에 가니 천 원이 더 싸졌다. 어제 사놓은 계란 한 판에서 단 한 개도 쓰지 않았는데... 오늘 살 걸 싶다. 괜히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제도 분명 평소보다는 싸게 산 것인데 말이다.
장을 자주 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 손해 본 것도 아니지만 괜히 억울한 것 같은 기분, 이런 감정을 마트가 아닌 병원에서 만난 줄이야. 연속으로 난자 채취를 시작하고, 병원에서 받아온 주사를 5일 동안 맞고 또다시 병원에 방문했다. 의사의 말을 듣고 있는데 왜 마트에서 산 계란이 생각났을까.
"LH*, FSH** 수치가 너무 떨어져 있어요. 그래서 난포가 천천히 자라는 것 같네요. 지난번 맞았던 퍼고베리스 주사 있죠? 수치가 너무 낮아서 그 주사를 보험으로 맞을 수 있으니 처방할게요."
*황체형성호르몬, **난포자극호르몬
극난저(난소기능저하)이긴 해도 LH, FSH인 여성호르몬 수치는 딱히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었다. 이번 차수의 등장한 새로운 이슈였다. 시험관은 고차수가 되어도 매번 새롭달까. 지난 차수를 포함해 조기배란의 위험성이 컸던 최근과 달리 이번에는 난포가 현저히 느리게 자란다는 것은 호르몬 수치가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난 차수에 하루에 무려 10만 원으로 멘붕을 안겨준 주사계의 에르메스! 그 주사를 이번엔 무려 비급여가 아닌 급여로 맞게 된 것이었다. 비싼 주사를 싸게 맞게 되었다고 웃어야 할지. 지난번에 100% 자부담으로 맞은 게 괜히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때도 호르몬 수치가 이상이 있었으면 싸게 맞았으려나 하는 생각까지 들던 차에 진료실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수납창구로 갔다. 영수증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분명 보험 적용이 된다고 했는데 30만 원이 훌쩍 넘은 금액에 아무래도 미심쩍어 다시 물어봤다.
"보험적용이 된다고 했는데... 이 금액이 맞나요?"
돈 얘기는 항상 불편하지만, 말해야 했다. 직원은 간호사와 다시 통화를 하더니 금액을 변경해 주었다. 진료실에서 오더 내린 건 퍼고베리스 펜 타입, 펜 타입은 보험 적용이 안된다. 같은 제품이지만, 병으로 나와 직접 가루와 액체를 섞어 주사제를 만들어야 하는 제품만 보험이 적용된다고 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고 있었다면 생각 없이 비싼 펜 타입을 받아와서 별생각 없이 주사를 맞았으려나. 나중에 알았다면 땅을 치고 후회했을 것이다. 역시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물어봐야 한다. 다행히 30만 원 넘었던 금액이 병 타입으로 바뀌면서 만원도 채 나오지 않았다. 앉은자리에서 30만 원을 넘게 절약했다. 물론 펜 타입이 주사제를 따로 섞을 필요도 없어 편하지만, 그래도 30만 원의 가치는 아니지 않은가.
천 원 비싸게 계란을 샀다고 왠지 씁쓸했는데, 30만 원이라니. 이제 앞으로 장을 보다 다소 억울한(?) 상황을 만나면 오늘을 생각해야지. 뿌듯함을 안고, 괜히 아낀 돈으로 뭐라도 사고 싶어 올리브영과 빵집을 어슬렁 거리다 집에 돌아왔다.
비싸서 주사계의 명품이라 불리는 그 주사를 두 번의 차수 연속으로 맞게 되었다. 이렇게 명품을 자주(?) 만나게 되어 황송할 따름이다. 사실 지난번에 첫 4일 배양이 나온 것은 퍼고페리스 주사 때문이 아닐까 믿고 있던 터였다.
마침 퍼고베리스를 맞은 다음에 배아 이식을 하면 성공 확률도 높아진다는 글도 보았기에 이번 차수에도 같은 주사를 한번 더 맞고, 난자 채취를 하고, 다음에 배아이식을 하면? 성공확률도 당연히 올라간다고 기분 좋은 성공회로를 돌려대었다.
그나저나 이 비싼 주사를 싸게 보험 적용해 주는 다 이유가 있는 법. LH(황체형성호르몬) 수치가 갑자기, 그것도 심하게 낮아진 탓이다. 지난번 차수에 아무리 적은 개수를 채취했다고 해도 연속된 채취의 몸에 무리가 간 걸까. 최근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호르몬 수치의 영향을 준 걸까.
지난 차수와 몸상태가 다르니 같은 주사를 맞더라도 결과는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아 상대적으로 싸게 맞는 주사지만 왠지 결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든다.
진료실을 나올 때 난포가 빨리 자라는 것보다 늦게 자라는 게 더 낫다고 위로하듯 말해준 의사의 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그 말이 퍽 위로가 되었나 보다. 천천히 자라면 초음파를 자주 확인해야 해서 병원 갈 일도 더 많고, 애태우는 시간도 많아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비싼 주사를 싼 값에 길~게 맞을 수 있으니 더 좋은 건가.
평소보다 더 자주 초음파를 보러 병원에 갔다. 난포는 계속 한 개만 보이다가 이제 2개가 보인다고 한다. 천천히, 그리고 무사히 채취되길 기원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이제 아낀 돈으로 치킨을 시켜보자. 배달 앱을 켜고, 치킨을 싸게 먹기 위해 이 브랜드, 저 브랜드를 오가며, 쿠폰을 먹여본다.
조금이라도 싸게 먹기 위한 노력에 치킨도 예외는 없다. 30만 원이 아닌 3천 원 일지라도. 어디서 짠내가 폴폴 풍겨오는 것 같다. 오늘도 시험관을 통해 인생을 배운다. 아니, 이렇게라도 정신승리하며 버티고 있다. 설마 같은 주사를 싸게 맞았다고 효과가 다른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