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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든밍지 Apr 24. 2024

시댁 제사에 불참했다

병원에서 명절을 보내는 이유

  휴직을 하고, 본격적으로 시험관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다.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일도 아닌데 시댁에는 좀처럼 말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2~3개월 정도 병원에 다니면 임신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되고 나면 사실 그때 그랬었노라고 말할 계획이었다.


  너무 희망찬 미래를 그렸던 탓일까. 시간이 지나도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는 잘 다니냐는 시댁 어른들의 물음에 남편과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충 말을 돌리곤 했다. 거짓말은 우리 부부의 취향이 아닌지라 이제 말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쯤, 시할아버님께서 대장암 선고를 받았다.


  시어머님과 아버님은 일을 하시면서도 주말과 평일에 혼자 살고 계신 시할아버님 댁과 입원해 계신 병원을 자주 찾았다. 고령의 나이의 수술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했지만, 가족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인지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런 상황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큰 일을 치르고, 한숨 돌리고 있는 상황에 걱정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어쩌면 말하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부모님이 친부모님보다 더 편하다며, 같이 쇼핑도 가고, 여행도 가는 사람들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현실에서도 물론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한 그렇게까지 막역한 고부사이는 흔하지 않다. 막장 드라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불편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리 집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의와 도리는 다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했다. 다행히 적당히 무관심한 시부모님 덕분에 남편과 시댁 문제로 싸우거나 부딪힐 일은 없었다.


  내가 결혼한 해부터 시댁은 갑자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시할머님이 같은 해에 돌아가시자 90이 넘으신 시할아버님은 부인의 제사는 꼭 지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가족들은 집안 어른의 강경함에 못 이기는 척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제사를 지내기로 했지만, 우리 부부는 의도치 않게 제사를 불참한 적이 많았다. 시댁 식구들이 명절 전 벌초를 하다 모두 코로나에 걸려 가지 않은 명절도 있었고, 시골길이라 눈이 너무 많이 오면 차가 진입하기 어려웠기에 가지 않은 명절도 있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막상 제사를 지낸 경험은 거의 없었다.


  남편은 제사에 반대하는 사람 중 하나였지만, 시할아버님께는 누구보다 귀한 친손주였다. 명절 당일 새벽에 치러지는 제사에 늦게 갔을 때는 섭섭한 기색을 표현하시기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새벽 4시에 출발해 제사에 늦지 않게 참여하려 애썼다.


  4일 배양 난자가 1개 나왔다. 한번 더 채취를 해야 하는데 마침 생리일과 명절이 겹쳤다. 난임 병원은 명절 당일과 대체 공휴일에만 진료를 한다고 했다. 대체 공휴일은 이미 생리 2~3일 차가 지나버려 꼭 명절 당일에만 병원 진료를 받아야 했다. 명절 당일은 제사가 있는 날인데...


  '남편만 보낼까. 시댁에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1년 넘게 숨겨왔던 진실을 말할 때가 찾아온 것 같았다. 남편도 오랫동안 숨겨왔던 진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이 많은 눈치였다. 결국 명절 전 날 남편은 시댁에 사실대로 말했다.


  "시험관을 하고 있는데, 명절에 병원을 가야 해."

  짧고 굵은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 능력에 새삼 감탄할 수밖에. 나 같으면 처음부터 구구절절 사연을 늘어놨을 텐데. 생각보다 쿨한 시어머님의 반응에 더 놀랐다. 남편이 바꿔준 수화기 너머에 어머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병원을 가야지~ 우리가 할아버님께 잘 얘기할게. 제사 지낸다고 괜히 너희에게 부담을 준 거 같네. 우리도 사실 제사를 지내던 집이 아니라 잘 몰라. 그냥 아버님이 하래서 하는데... 전혀 부담 갖지 마~ 명절 아닐 때 봐도 되니까. 그나저나 시험관이 너무 힘들 텐데... 어쩌니... 여기는 신경도 쓰지 말어."


  그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뚝뚝 눈물만 떨어졌다. 시어머님은 흐느끼는 나를 알아챘는지 같이 울컥하신 것 같았다. 평소에 나의 별명은 '젊 꼰(젊은 꼰대)', '유교걸'이었다. 그런 성향 탓에 시댁 제사에 될 수 있으면 꼭 참석하는 게 손주며느리의 덕목이라고 은연중에 계속 생각해 왔다.


  파워 J답게 이미 세워 놓은 계획을 어머님께 설명했다. 제사에 남편만 먼저 보내고, 나는 병원이 끝나고 바로 가겠다고 했다. 이미 시간대별로 할아버님 댁으로 가는 버스표를 다 예매해 놓았다고 말이다. 생리가 시작하고 나서 야심 차게 준비한 계획이었다.


  어머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며느리를 난임병원에 혼자 보내는 것이 너무 싫으시다며, 절대 오지 말라고 으름장까지 놓으셨다. 남편도 혼자 제사는 안 간다고, 같이 병원에 가겠다고 완강하게 얘기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버스표를 다 예약했다고 우겨보았지만 완강히 거부당했다.


  결국 전화를 끊고, 열띤 토론 끝에 시할아버지댁으로 향했다. 정 마음이 불편하면 전날이라도 다녀오자는 남편의 제안이었다. 안 가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동의했다. 할아버님은 하루 먼저 온 우리를 보고 자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하셨다. 잠이 드신 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는 더 섭섭해하셨으려나.


  명절 당일 병원에 오픈런했다. 오픈 시간이 지나자 점점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들어차 앉을자리조차 없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이지만, 연휴를 반납한 의료진들과 임신을 위해 달려왔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여기가 꽉 막히는 고속도로 한 복판인 듯 멀미가 몰려왔다.


  연휴로 의료진은 축소 근무를 하기 때문에 초음파 진료는 평소보다 2~3배는 오래 걸렸고, 주치의가 아닌 당직 의사에게 진료를 받아야 했다. 병원에만 5시간을 넘게 있었다.


  연속 채취를 강행한 대가가 이건가. 이번에 휴식을 택했다면 명절에 병원에 올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아무렇지 않은 척 제사도 참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댁에 진실을 조금 더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시댁에서는 그 이후로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결혼 3년 차였지만, 언제 애를 가질 거냐는 식의 부담 섞인 질문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무관심한 척 하지만, 사실 그 안에 배려심을 숨겨놓는 분들이란 걸 알고는 있었다. 말한다고 이해 못 할 분들도 아닌데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난임이 숨길 일이 아니라지만, 숨기고 싶었나 보다.


  명절과 제사, 그리고 병원 진료일이 겹치는 바람에 꽤 오래 숨겨왔던 진실을 말하게 되었다. 막상 털어놓고 나니 후련한 기분까지 든다. 시부모님이 원래 좋은 분들인 건 알았지만, 마음의 선이 조금은 아니 꽤 흐려진 느낌이다. 어쩌면 이제는 사실을 말할 때라고, 마음의 짐을 좀 나눠 가져도 된다고 조상님께서 주신 기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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