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든밍지 May 22. 2024

피검사 기다리다 피가 다 마르겠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시험관의 시작은 난자채취이지만,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배아 이식이다. 이식한 배아가 착상이 되어야 성공이다. 이식한 배아의 배양 일수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은 이식 후 11일 전후로 피검사 일정을 잡는다. 병원에 가서 피를 뽑고, 정확하게 임신 여부를 판단하는 일종의 성적 발표날 같달까.


  이식 후 일주일 정도는 임테기(임신테스트기)에서 자유롭다. 어차피 임신이 되었어도 아직 임테기에도 나오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멘탈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기이다. 오히려 착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며 이런저런 성공회로를 돌려댄다. 마음은 벌써 임산부라도 된 듯 무리하지 않고, 열심히 챙겨 먹는 시기이기도 하다.


  일주일이 지나고, 피검사 날이 다가오는 8-9일 차에 접어들면 슬슬 멘탈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임테기를 할지 말지에서부터 시작한 고민은 반나절을 못 넘기고, 임테기의 노예가 된다. 의심의 여지없이 '비임신'이라는 한 줄을 봤어도 쉽사리 손에서 놓지 못한다.


  멘탈이 부서져 산산조각이 나도 임테기의 중독된 사람처럼 하루에 몇 번씩 임테기를 찾는다. 이때의 심리 상태는 '늦은 착상도 있다더라. 병원 가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말을 굳게 믿음과 동시에 희망고문에 사로잡혀 절망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못하는 양가적 감정의 혼란기이다.


  한 줄 보는 것을 반복하다 피검사 당일이 되었다. 피검사 결과는 바로 나오지 않는다.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오전 검사 시 결과는 오후에 나오고, 오후 검사는 다음날 오전에 알 수 있다. 전 병원에서는 피검사만 하고 가면 결과를 전화로 알려주는 시스템이었는데 바꾼 병원은 의사의 진료를 보고, 피검사를 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침울한 표정으로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피검사는 아직 하지도 않았지만, 임테기의 반응을 물은 것이다. '보통 다 하고 오기 때문이겠지.' 생각하며, 덤덤하게 한 줄이라고 말했다. 질정을 끊어야 되는지도 물었다. 의사는 안타까운 표정과 말투로 일단 오늘 저녁 질정은 넣지 말고, 혹시 모르니 내일 아침 질정은 넣으라고 했다.


  일말의 희망을 안겨준 채 진료는 끝이 났고, 피검사 결과는 그동안의 수많은 임테기가 미리 말해준 것처럼 0점대로 비임신 종결되었다. 3개월 동안 모은 2개의 배아, 이식 후 결과 확인까지 약 4개월 간의 여정이었다. 연속 채취로 시간을 아꼈다고 생각했지만, 실패로 끝나버린 결과에 아낀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수능 날이 생각났다. 정신없이 시험을 보고, 집에 와서 부모님과 저녁을 먹었다. 뽑아둔 수능 시험지를 다시 풀어 채점을 했던 밤이었다.


  '몇 번을 했더라...' 두 개의 보기 중 고민했던 문제가 과목별로 몇 개 있었기에 채점한 점수는 확실치 않았다. 그 문제의 정답 여부에 따라 등급이 달라지는 상황이었다. 한 과목도 아니고, 여러 과목이. 각종 사이트에 뜬 등급 컷을 바라보며, 부디 정답으로 체크했길 바랐다.


  그러면서도 왠지 오답을 찍었을 것 같은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며, 하늘이 도와 정답을 찍었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불안하지만 한 줄기 희망에 의지해 시간을 보냈다. 수능 성적표를 보고 여지없이 오답을 찍은 게 확실해졌지만.




  임테기로 이미 결과를 봤다. 임테기가 틀릴 확률보다 맞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럼에도 피검사 결과를 볼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마음, 수능 성적표를 두 눈으로 볼 때까지 품었던 희망과 비슷했다. 너무나 절실하기에 포기가 되지 않았던 거다. 알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거다.


  확실한 결과를 속 시원히 알고 싶으면서도 모르고 싶었다. 결과를 알기 전 피가 마르는 그 시간이 너무 힘들지만, 모순적이게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준비한 시간은 길고, 노력 여부의 상관없이 결과는 처참했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시 시작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인생드라마에 속하는 '응답하라 1994' 속 칠봉이의 명언이 스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사실은 미국 프로 야구 선수 요기베라가 꼴찌팀 감독을 할 때, 가망 없다는 기자들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과연 어디가 끝일까. 포기하는 순간? 성공하는 순간? 후자가 더 마음이 끌리는 건 아직도 버리지 못한 한 줄기 희망 탓이려나.

이전 16화 소고기에 질려 버렸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