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든밍지 Jun 05. 2024

제주도 가기가 이렇게 어려울 일이야?

마음 편히 여행 갈 수 있는 날이 올까

  직장인에게 휴가는 어떤 의미일까. 로또처럼 막연한 희망이 아닌 손에 잡히는 실현 가능하고, 공식적인 휴식시간이 아닐까. 휴직을 하기 전에 내 모습을 돌아보면, 6개월 전에 끊어놓은 유럽행 티켓이나 때 이른 여름휴가만을 바라보며, 야근을 견뎌내고, 영혼 없는 출근을 반복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 직장은 휴가 일수나 시기가 꽤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남편의 직장은 1년에 2번, 상, 하반기에 1번씩 5일의 휴가만 가능했고, 그래서인지 남편은 유독 휴가를 기다렸다. 그전에는 주말을 더해 같이 해외여행을 가기도 했으나, 시험관을 시작한 이후로는 짧은 국내여행에 그쳤다. 그 마음을 여행 유튜브로 달래고 있는 걸 보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번에 제주도에 가자고 말을 꺼낸 건 남편이었다. 사실 지난번 휴가 때 나 없이 시댁식구들과 제주도를 다녀와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갈만한 국내 여행지 중에는 제주도를 제일이라고 여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섬에 간다는 것, 생리가 시작하면 곧장 병원에 가야 하는 대기 상태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삶에서 장거리 여행은 불안하고, 두렵기만 했다.


  남편의 휴가 일정은 이미 3개월 전에 정해서 회사에 제출한 터였고. 내 생리 일정은 감히 판단하거나 종잡을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핸드폰 생리 어플의 날짜 계산기는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휴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남편을 실망시킬 수 없어 차마 가지 못하겠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못 이기는 척 제주도행에 동의했지만, 출발하기 3일 전에야 비행기표를 예매했고, 숙소는 출발 하루 전, 바로 다음날 1일 치만 예약했다. 계획에 죽고, 계획에 사는 파워 J인 나에게 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여차하면 돌아와서 병원에 간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무계획을 최선으로 여겼다.


  사실 계획형 인간답게 이미 그전에 배란 초음파를 몇 차례 병원에 가서 보고 온 터라 어느 정도 생리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 가장 빠른 생리 예상일이었다. 생리 2~3일 차에 병원을 방문하면 되었기에 계획한 대로 이뤄진다면 아무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일은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출발 하루 전, 자려고 누웠는데 느낌이 쎄했다. 3박 4일로 잡은 일정이었데 생리가 시작할 기미가 보였다. 갈색혈이다. 보통 착상혈이 갈색이라고 하던데...! 설마 지난번에 시도했던 자연 임신시도가 성공한 것인가.


  임신인지 생리의 시작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30분에 한 번씩 잠에서 깨다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눈뜨자마자 시도한 임테기는 역시나 한 줄, 임신이 아니라면 생리가 시작될 신호였다. 아침 비행기를 꾸역꾸역 타고 가면서도 얼굴은 죽상을 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이런 표정이었을까.


  막상 제주공항에 내려 근처 맛집에서 밥을 먹고, 이런저런 관광지를 다니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즐거웠지만, 여전히 불안은 계속되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도 병원 홈페이지 1:1 상담란에 주치의에게 보낼 장문의 상담 내용을 작성하면서 여행지 와서 일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생각했다.


  생리할 기미는 그 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되었지만, 확실히 시작하지는 않아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애꿎은 제주도 난임병원을 검색하거나 주치의의 답변이 달리기만을 기다렸다. 제주에 온 지 이틀 차, 월요일. 피의 색의 붉은색이 얼핏 보이는 게 이제는 정말 시작할 조짐이었다.


  돌아가기로 예정되었던 수요일 저녁 비행기 표를 부랴부랴 같은 날 오전으로 바꿨다. 여행 내내 불안에 떠는 나를 지켜보았기에 이미 예상했다는 듯 쿨한 반응의 남편은 서둘러 비행기표 변경과 렌터카 조기 반납 등을 알아보았고, 일사천리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비행기 취소 수수료는 물었지만, 병원을 못 가게 되어 이번 차수를 놓치고 자책하는 것보단 나았다. 생리 2~3일 차에 병원에 방문하여 주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오전 비행기를 타고, 오후에 병원을 가는 걸로 계획을 변경했다.


  다행히 돌아가는 날은 같아서 여행 일정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제주도에 있는 내내 불안감에 떠느라 5성급 호텔에 묵으면서도 마음 한편은 찜찜했다. 이번에 일정이 맞지 않으면 쉬어가라는 게 하늘의 계시라며 친정 엄마와 남편은 쿨하게 반응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배아 이식 실패의 충격으로 지난 주기를 이미 한 번 쉬었다. 이번 주기는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김포공항에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제주도에 가는 것도 어려운데 해외여행은 꿈같은 소리였다. 시험관을 시작한 후부터 아니, 난임 판정을 받은 이후부터였을까.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인생의 순서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형태로 꼬여 버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을 한가득 든 채, 병원으로 향했다. 초음파로 상태를 보니 오늘이 생리 1일 차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4~5일 동안 시작할 기미만 보이다가 병원에 간 날 마침 시작한 것이다. 사실 비행기표를 취소하지 않고, 원래 일정대로 왔어도 2일 차에는 병원을 방문할 수 있었기에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 내내 불안감에 떨다가 병원에 가는 게 조금이라도 늦어졌으면 얼마나 또 마음을 졸였을까 싶어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일찍 온 게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시작부터 어려운 이번 차수, 여행을 결심했던 나를 수없이 자책했다.


  전에는 몰랐다. 6개월 전에 미리 유럽행 비행기표를 예매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시점에 무조건 여행을 갈 수 있을 거라는 강한 확신, 얼마나 예상 가능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인가. 그동안의 인생이 운이 좋은 편이었나 싶기도 했다. 인생은 감히 예상할 수 없는 것인데...




  여행도 역시 갈 수 있을 때 많이 갔어야 했다. 지금은 병원이라는 족쇄에 매여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휴가를 애타게 기다린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왜 제주도에 가자고 했을까 원망스럽기도 했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쉬고 싶어 떠나는 여행인데 이제는 일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니. 비참했다.


  일기예보가 맞지 않으면 사람들이 기상청을 욕하듯 초음파로 생리 예정일을 확인했는데도 맞지 않았기에 병원을 원망했다. 탓할 상대가 필요했다. 자연과 인간의 몸은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인류의 기술을 맹신한 결과로 마음고생을 얻은 것인가.


  제주행 비행기가 이륙을 시작할 때, 귀가 먹먹한 탓인지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 옆에서 소리 내어 울고만 싶어졌다. 귀보다 마음이 더 먹먹했다. 언제쯤 맘 편히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어쩌면 그런 날은 이미 지나가 버려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이전 18화 솔드아웃된 소금빵을 기다리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