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지옥) 유명한 병원의 더 유명한 의사를 만나기까지!
가장 빠른 예약일로 예약하고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다가오는 예약일 바로 하루 전, 생리가 시작했다. 보통 생리 시작 2~3일 차에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데, 마침 예약일과 생리일이 겹치다니, 이 무슨 신의 계시인가! 이번 초진 예약일에는 상담정도만 받고, 생리가 시작하면 한번 더 가야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운이 좋았다. 두 번 갈 일이 한 번으로 준 것이다.
유명한 떡집의 오픈런도 해봤고, 빵집 웨이팅 4시간도 해봤다. 내가 예약한 병원은 이미 오픈런과 대기지옥으로 환자들에게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삼신할배를 보기 위해 지방에서도 많이 찾는 병원이었다. 시험관 카페의 후기글을 꼼꼼히 읽었다. 몇 시부터 대기를 걸 수 있는지, 보통 소요시간이 어느 정도 인지...
빨리 출근하는 남편과 함께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둘러 대기 번호를 뽑고 진료가 시작하길 기다렸다. 대기지옥의 문이 열렸다. 대학병원의 난임클리닉과는 다른 규모와 시설에 압도되었다. 난임공장 같다는 카페의 후기글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놀이공원처럼 미로 같은 병원을 여기저기 누볐다기보다는 헤맸다.
전원 후 첫 방문이라 상담 간호사에게 1년여간의 상황을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진료기록을 보며 꼼꼼하게 그 간의 행적을 물어왔고, 대답했다. 평일 오전이었다. 9시가 넘어가자 병원 여기저기 놓인 의자에는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찼다. 삼신할배라 불리는 이 병원의 가장 유명한 의사의 진료실 앞에는 당연히 자리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럴 줄 알고, 책도, 아이패드도 챙겨 왔다. 초음파를 마치고, 꽤 쿨한 마음으로 대기 순서를 기다렸다. 병원에 8시에 도착했는데 11시가 넘어서야 진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주한 삼신할배라는 의사는 듣던 대로였다. 멘탈이 약한 사람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평이 머릿속에 스쳤다.
초진이라 상담이 길어졌다. 문제가 된 건 역시나 나의 혈소판감소증이었다. 언제부터 발병되었는지, 증상은 보통 어떤지, 여기는 대학병원이 아니고, 난임전문병원이기에 수혈할 상황이 발생하면 혈액수급 등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빠른 대처가 어려워 위험할 수도 있는데도 감수하겠냐며, 현실적이고, 우려되는 부분을 콕콕 집어대며 의사는 몇 번을 물었다.
병원을 이미 옮기겠다고 했을 때 예상했던 시나리오였다. 단호하게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나의 안전을 담보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꼭 성공해야 했다. 오히려 지난 1년간 정말 수혈하는 상황이 발생하진 않았다며 의사를 설득했다. 날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마침 지난 주기는 한 번 쉬었고, 오늘이 생리 2일 차라고 하니 의사는 꽤 걱정되는 표정을 하면서도 내 단호한 태도에 끝내는 시작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번에도 저자극 요법으로 시행할 것이냐고 묻자 큰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며 과배란 주사를 잔뜩 처방했다.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피검사를 하고, 주사를 받고, 남편 정액검사 일정을 다시 잡았다. 분명 7시 전에 집에서 나왔는데 끝난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아침, 점심은 당연히 먹지 못했다. 오전 시간 꼬박 병원에 있었고, 집에 갈 일이 또 남아있었다.
빙수 브랜드에서 담아줄 법한 큰 일회용 보냉백에 아이스팩과 주사를 잔뜩 담았다. 하루에 맞아야 할 주사는 3개, 거기다 4일 치여서 무게와 부피는 상당했다. 불편한 손잡이를 잡고, 낑낑대며 걸었다. 그 와중에도 근처 유명 맛집의 만두와 호떡을 사가겠다는 대쪽 같은 일념하에 대기줄 제일 뒤에 섰다.
날을 추웠고, 대기는 길었다. 조금만 사려고 했건만 이렇게 오래 기다린 게 아깝고, 많이 사가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들고 갈 손도 없는데 무리해서 많이 샀다. 집에 도착하니 진이 빠졌다. 오늘 피를 10 통도 넘게 뽑은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한 건가. 시간은 어느새 남편의 퇴근 시간이 되어 있었다.
맛집을 기다리면 맛있는 보상이 주어진다. 이번에는 주사만 잔뜩 받아와 억울한 생각이 들어 기어코 맛집에 들러 뭐라도 사 오고 싶었다. 병원 오픈런과 기약 없는 웨이팅, 그리고 엄청난 병원비에 몸도 멘탈도 탈탈 털렸다.
한편으론 앞으로 펼쳐질 대기지옥이 두려우면서도 이상한 승부욕도 들었다. 나는 인플루언서도, 핫하다는 맛집 블로거도 아니었지만, 유명 맛집을 찾아다니며 오픈런과 웨이팅을 은근히 즐기곤 했다. 빨리 가서 받는 대기번호 한 자리의 쾌감을 느끼고, 대기시간 줄이는 꿀팁을 볼 때는 눈이 반짝이다. 겜알못 주제에 게임의 미션 같달까.
이 관문을 다 뚫고 나면 분명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찬 생각과 함께 어느새 다음 예약일을 가상 VR게임처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본다. 입구에서부터 앱으로 초음파 대기 버튼을 누르고, 이동하며 진료실 대기를 걸고, 의사에게는 뭘 질문하고, 대기하며 무슨 책을 볼지, 어떤 간식을 사 올지까지 말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아니,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했던가. 둘 다 맞는 말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까 뽑은 열 통의 피보다 더 귀한 시간을 버리고, 또 버려야 했다. 그 시간을 버리는 게 아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시간이 되려면 정신승리의 탈을 쓴 합리화 과정이 있어야 했다.
성공으로 가는 길에 필연적인 기다림이다. 자연임신, 시험관을 한 번에 성공했다는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자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병원을 오픈런하고, 대기지옥을 견디는 게 더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번 오픈런의 보상은 빵도 떡도 아닌 무려 아기천사라고 되뇌며, 기약 없는 보상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