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말고 주사로 만나는 명품
물욕이 없는 편이다. 결혼식에 나 빼고 다 들고 오는 명품가방에 크게 굴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주워들은 얘기는 꽤 많아 명품백의 브랜드와 대략의 가격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회초년생이 들만한 100만 원 대의 명품백 브랜드부터 고가의 예물용 명품백 브랜드까지, 명품백 피라미드의 서열 정도는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중 꼭대기 층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브랜드가 있으니... 바로 에르메스다. 로마 공항에서 양가 어머님들의 선물용으로 스카프를 산 적이 있다. 주황색 쇼핑백부터 고급져 보이던 바로 그 브랜드다.
보험적용이 되지 않아 유난히 사악한 가격으로 과배란 주사계에서도 에르메스라 불리는 주사를 내가 맞게 될 줄이야. 주사를 받아오면서도 그렇게 귀하신 몸인 줄 몰랐다. 쫄쫄 굶고 저녁이 되어 입에 뭐라도 넣으니 그제야 머리가 돌아가는지 병원에서 준 영수증이 눈에 들어왔다.
찍힌 금액은 70만 원이 넘었다. 정부 지원금을 나중에 정산해 준다는 얘기를 들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는데 비급여 항목 금액이 40만 원이 넘었다. 비급여는 지원이 안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금액이 나온 건지 물었더니 처방한 주사가 비급여 항목이라고 했다. 하루에 한 번 맞는 주사가 약 10만 원이었다.
오늘 줄 서서 산 호떡과 왕만두를 몇 개 살 수 있는 금액인지 쉽사리 계산되지 않았다. 마트에서 과일 하나 살 때도 비싸면 들어다 놨다를 반복하며, 주저하게 되는 고물가 시대에! 이번 주사는 꽤... 아니 많이 비싼 금액이었다.
보통 이렇게 비싼 주사를 처방할 때는 환자에게 얘기라도 해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었다. 역시 후기처럼 의사의 친절한 설명은 기대할 수 없었던 걸까. 이번 병원을 믿고 다니기로 했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주사 후기를 찾아봤다. 이름도 왠지 고급진 '퍼고베리스' 주사였다. 시험관 카페에서는 이미 가격을 보고 놀랐다는 사람들의 후기가 넘쳐났다.
가격이 후덜덜한 만큼 효과도 좋아 난자 질이 좋아졌다는 말도 있었고, 난자 채취 개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런 얘기들만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물론 아무 효과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워낙 비싸서 배란 전 2~3일만 반짝 맞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미 초장부터 맞기 시작해 버렸다. 효과가 좋아야만 했다. 그러다 덜컥 겁이 났다. 과배란 주사는 보통 배란 전까지 10일을 넘게 맞는다. 하루에 10만 원씩, 주사값만 약 100만 원이 나가게 생긴 것이다. 물론 지원도 안될 것이고, 계속해서 그 주사를 처방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간에 갑자기 바꾸는 경우는 흔치 않다.
효과가 좋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효과가 없다면? 흔들리는 멘탈을 부여잡았다. 시간도, 돈도 많이 드는 일이라는 건 1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으면서 난임 전문병원의 스케일에 다시 한번 놀랐다. 의사는 처방을 내렸고, 나는 비싸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도 없었다. 약빨이 찰떡같이 받기만을 바랬다. 다음번 진료 때 꼭 물어봐야겠다. 이 약을 계속 쓸 거냐고 말이다.
비싼 주사를 뜯는다.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싶어 바늘을 넣고 꽤 오랫동안 꾹 눌러주었다. 가방이 아닌 주사로 이렇게 또 명품을 만날 줄이야... 황송한 탓인지, 감격한 탓인지 눈에 살짝 고인 액체에 왠지 짠내가 느껴지는 것 같다.
내돈내산, 명품백... 아니 명품 주사후기는 '역시 비싼 게 좋네요. 돈값을 합니다.' 이런 후기를 과연 쓸 수 있을까.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 맞던 주사가 아니라 그런지 몸이 좀 심하게 붓는 것 같다. 비싼 주사의 약빨이 잘 안 받으면 큰일 나는데! 유난히 땡땡해진 종아리를 손으로 툭툭 치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