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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빠가 미안해

[ 향수, 정지용, 애플북스 ]


[ 향수, 정지용, 애플북스 ]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조선지광],1930.1

 세상 그 어느 고통보다 크고 괴로운 것은 바로 부모가 자식을 잃는 고통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분신이자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다는 것, 영원히 품에 안을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직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막연하게 상상할 수 있을 뿐, 이를 절대 온전히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정지용 시인의 시 [ 유리창 1 ]은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감각적인 언어들로 절제하며 극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작가는 어린 아들을 폐결핵으로 인해 잃는다. 비록 이 시는 아들을 상상하며 썼지만, 그는 이후에 딸도 잃어 또 한 번 상실의 아픔을 겪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죽어가는데도, 부모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느낌은 과연 무엇일까. 시인은 차마 울부짖고만 있을 수 없었기에, 이를 시로서 표현해냈다.


 나는 시를 분석하는 것을 혐오한다. 분석이란 단어는 보다 논리가 있는 것, 짜임새가 있는 것들에나 어울리는 단어이다. 시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시는 그저 느끼는 것, 문장과 단어들을 마음의 거울에 비춰 각자만의 고유한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시 감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시를 쓰게 된 배경은 이를 도와주는 감초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이 [ 유리창 1 ]을 읽으며 마음속 깊이 정지용 시인의 상실에 대한 아픔과 무력감을 '느꼈다'. 


 그는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로, 너무나 깊고 어두운 슬픔을 표현해냈다. 아이를 잃은, 아비 된 사람으로서 느끼는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시를 쓰는 이의 여린 감성에 덮쳐온 이런 커다란 파도는, 만일 정지용 시인이 이 때문에 방황한다 해도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을 만큼의 것이었다. 

 하지만 시인은 이 감정에 몸을 맡겨 휩쓸리는 대신, 이를 시로서 승화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산새가 된 아들과, 이를 유리창 너머 멀리서 바라보는 자신.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밤, 별. 이 환상적인 풍경은 역설적으로 현실의 아픔을 더욱 온전하게 드러낸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읽고 난 후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한 명의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이, 정지용 시인에 대한 존경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 유리창 1 ]말고도 정지용 시인을 대표하는 시들은 많다. [ 향수 ], [ 바다 ], [ 고향 ] 등 그는 이 책에서 참으로 순수한 언어로 세상 만물을 표현해낸다. 

 서정시를 좋아하는 내게는 이러한 정지용 시인의 감성적인 언어가, 마치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듯했다. 정지용 시인은 어렵고 난해한 단어를 결코 쓰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주로 자연물을 이용해 독자에게 한 폭의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시마다 다른 맥락을 통하여 그는 같은 '하늘'이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품게 만든다. 이러한 능력은 정지용 시인만의 재능이자,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이 시집 [ 향수 ]는 내게 교과서이자,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여행지였다. 

 마지막으로 [ 유리창 1 ]에 대해 떠오른 것은, 요즘따라 더욱 잦은 어린아이들의 '참사'이다. 내가 쓴 시 [ 무제 ]에서도 표현했지만, 지금 가장 힘든 이는 하늘로 아이를 돌려보낸 부모들일 것이다. 얼마나 자신이 원망스러울까. 감히 그들의 아픔을 상상해 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결코 그 전부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들을 잃어버린 까닭은 분명히 어른인, 우리들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 아이들을 좀 더 보살피고, 관리해야 할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무방비하게 방치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세림이 법, 슬리핑 차일드 체크 제도 등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방법들이 과거부터 끊임없이 제시되어 왔지만 우리는 무리다, 여력이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이를 기피해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죄 없는 우리 아이들의 상실이었다. 


 내 꿈은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꿈이 생겼는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꿈에 대한 진정성만큼은 누구 못지않다. 진로 역시 아동 복지 쪽으로 준비 중이고, 내가 시를 쓰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도 이 꿈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지금도 진행 중인 우리 아이들의 고통은 내게 너무나도 괴롭다.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현실이 슬프고, 그들을 위해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또 한심하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알기에, 조금은 덜 불안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 또한 든다. 이번 동두천, 화곡동 어린이집 참사를 겪으며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아픔에 공감하고, 다 같이 분노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충분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이를 바꾸기 위해 내 '미래'를 걸고, 노력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나뿐만이 아닌 다른 이들 역시 동참해 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것만이 스러진 우리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 믿기에. 


 지켜주지 못 한 어른의 미안함을 담은 편지를 마치며, 하늘에서만은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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