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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오늘도

[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


[ 혼자 가는 먼 집, 허수경, 문학과지성사 ]


 씁쓸한 여관방



 꿈에도 길이 있으랴 울 수 없는 마음이여  

 그러나 흘러감이여


 제일 아픈 건 나였어 그래? 그랬니, 아팠겠구나

 누군가 꿈꾸고 간 베개에 기대 꿈을 꾼다


 꽃을 잡고 우는 마음의 무덤아 몸의 무덤 옆에서

 울 때 봄 같은 초경의 계집애들이 천리향 속으로

 들어와 이 처 저 처로 헤매인 마음이 되어

 나부낀다, 그렇구나! 그렇지만 아닐 수는 없을까


 한철 따숩게 쉬긴 그런대로 괜찮았으나

 몸은 쉬고 간다만 마음은? 마음은 흐리고 간다만 몸은?

 네 품의 꿈. 곧 시간이 되리니 그 품의 문을

 누군가 두드린다, 나갈 시간이 되었다고?

 오오, 네 품에도 시간이 있어


 한 날 낙낙할 때 같이 쓰던 수건이나 챙겨

 어느 무덤들 곁에 버려진 꿈처럼 길을 찾아

 낙낙한 햇살 아래 꾸벅꾸벅

 졸며 있으리라

 쉬고 싶다, 이 말을 자연스레 중얼거리게 되는 어느 월요일의 저녁이다. 주말에 쉬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늘 하루가 견디지 못할 만큼 바빴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오늘 아이가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듯 쉼을 간절히 바란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지치게 만들었는가.


 허수경 시인의 [ 씁쓸한 여관방 ]은 이런 나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시인듯싶어 선택하게 되었다. 이 시에서 화자는 홀로 여관방에 누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같이 위로한다. 하지만 그 위로는 사전적 의미처럼 일방적인 편안, 안도, 공감과 같이 따뜻함을 지니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더 어지럽히는 듯 보인다. 시인은 이 좁은 방에 누워 꿈을 꾸며 그 어지러움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 꿈을 꿈으로 놔두지 않고 나갈 시간이 왔음을 깨우쳐준다.


 나는 이 시에서 시인이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두를 관조(觀照) 하고 있다고 느꼈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는 모두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그 끝에 꿈을 이뤘느냐, 못 이뤘느냐는 중요치 않다. 단순히 그 피 흘리듯 아픈 고통의 과정을 지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세상에 의해 '강제적으로 아름답게' 묘사된다. 하지만 시인은 묻는다. 진정으로 꿈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것은, 행복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아니다,라고 이 시를 읽으며 나는 느꼈다. 우리는 먼 미래, 현실이 될 지도 알 수 없는 그 한낱 신기루를 향해 '지금 당장'을 고통 속에 처박는다. 누구는 꿈을 신기루라 부르는 것에 화를 낼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령 당신이 그렇더라도, 심지어 그 꿈을 이뤄냈더라도 당신의 '지금'은 진정 행복을 누리고 있는가? 꿈이라는 이름 뒤에 희생되고 있는 '현재'는 안녕한가?


 오늘도 꿈을 향해 달려가다 피로를 경험하는 이들이 나뿐만이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괜찮다. 당연한 일이다. 얼마나 그 모습이 신기루와 같았으면 꿈을 목표라 부르지 않고, 이중적인 의미인 '꿈'이라고 선조들이 이름 붙였을까. 그 괴로움은 슬퍼해도 되는 자격을 이미 부여받은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잠시 쉬어가길 바란다. 햇살은 이미 사라져버렸지만, 우리에게는 달빛이 남아있으니까. 고요한 달빛 아래 오랜만에 마음껏, 침묵해 보자. 이는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이다. 


 자, 지금부터 나는 게을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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