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조금 이른 저녁, 함께 식사를 합니다. 해가 긴 계절답게 오후 6시 반에도 창 밖은 윤슬로 가득합니다. 당신은 하이볼 난 무알코올 칵테일을 기울이며 사적인 조곤거림을 나눕니다. 소란스럽던 윤슬이 자자해졌고 어느샌가 붉은 낙조가 서렸습니다.
당신은 낙조 같아요.
약간 갸웃거리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요. 그러니까, 해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요. 한낮의 해는 너무 뜨겁고 밝아 바라볼 수 없어요. 오히려 한껏 고개 숙여 내 그림자만 바라보게 할 뿐이지요. 당신은 해 중 가장 존재감이 큰 낙조와 닮았어요. 가장 새빨갛고 강렬하고,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요.
또 하나. 당신은 새벽 같은 사람이에요. 작은 소리마저 잘 들리는 고요하고 섬세한 시간이요. 감수성이 풍부함과 동시에 하루 계획을 세울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때 이기도 하고요.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 외로운 시간인 동시에 그로 인해 충만한 시간. 결국 날이 밝을 그런 새벽이요.
요즘 내 생활의 중력은 당신을 향해있어요. 올곧고 순조롭게요. 덕분에 안정적이에요.
그런 당신에게 나 꼭 드릴 말 있었답니다. 언젠가 무너져가는 목소리로 아직 제가 필요하다 얘기하셨지요. 참 행복했습니다. 기쁘고, 고맙고, 슬프고, 애잔한 순간이었습니다. 한껏 달려가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안기고 싶은 그런 마음이요. 그때부터 세심히 대답을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필요한 만큼 나를 이용하세요. 언젠가는 하염없이 맑고 명랑한 모습에 덩달아 웃게 만들게요. 인생의 조언이 필요할 때면 머리 맞대고 함께 고민도 해볼게요. 한참 울 곳이 필요하면 담요가 되어드릴 테니 마음껏 쏟아내고 품에 곤히 잠들어요. 서로가 밟아보지 못한 곳도 함께 디뎌봐요. 설렘과 기대로 가득 채운 선물 같은 일상도 함께 걸어요.
동시에 철저하게 당신만인 미래를 준비하세요. 내 옆에서,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 날 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일에 마음껏 도전해 보세요. 두려울 때면 내게 안길 준비를 하고요. 인생관을 마음 놓고 정립하세요. 결국 당신이 과거 신념으로 돌아간다 해도 괜찮아요. 때문에 날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고 얘길 해도. 이해할 준비는 내가 하면 돼요. 마음 편히 설계하고 모험하세요.
그렇게 사랑을 마음 편히 부정하고, 날 이용 한다고만 생각하며 시간을 쌓아봐요. 아무런 부담 없이. 그런데 만약, 아주 만약말이에요. 그럼에도 내가 자꾸 신경 쓰이고 여전히 사랑이라 느낀다면, 그땐 더 이상 사랑을 의심할 이유가 없을 거예요. 사랑을 사랑이 맞는지 장담할 수 있는가 물을 필요가 없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때라면. 우린 그저 박차를 가해 지금 못다 한 사랑을 열렬히 하면 돼요.
누군가는 이런 내 마음을 듣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생각이냐며 바보라 호통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제가 얘기한 것이 결국 여느 사람들이 하고 있는 사랑의 형태 아닐까 싶습니다. 이 사람과 내가 사랑이 맞을지, 이번엔 이전 인연들과는 다를지 긴가민가 하며 시간을 쌓는 것이요. 방향이 다름을 알게 된 때 각자의 길을 가기도 하는. 그런 검증의 시간이 끝났을 때 도 여전히 서로가 사랑인 것 같다면 그땐 사랑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기로 하는 것.
사랑은 애써 믿으려 노력하기보단, 부정할 수 없는 것. 손에 쥐려 안달 나야 한다기보단 결국 서로의 손을 잡고 있는 것. 어느샌가 눈 마주하고 웃고 있는 것. 그러니 굳이 사랑이라 확정 짓고 싶은 욕심에 되려 끊임없는 불안을 만나지 말기로 해요.
그러니까, 전 그저 사랑을 하자는 말을 돌려서 얘기한 것이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랑을 충분히 하자는 얘기예요.
그러니 당신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옆에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