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덤벼라. 내가 다 이겨주마’ 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만 내게도 아침에 눈 뜨기 싫고 이대로 삶이 멈췄으면 했던 시간이 있었다.
재수 학원에 등록해야 하는 동생과 짐 가방 두개를 들고 강남 고속터미널에 내렸던 날이었다. 그날 점심 때까지만해도 수트케이스 두 개에 급히 옷만 쑤셔 넣어진채로 서울행 버스를 타게될 줄은 몰랐다. 당장 올라가서 동생의 재수학원 등록을 하라며 짐을 싸라고 하는 아빠의 말에 토달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막차에 몸을 실었었다.
급한대로 새벽에 찜질방 신세를 진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살길을 찾아야했다. 당장에 바로 빈 방이라도 구하지 못하면 잘 곳이 없어 막막했던 날, 기적처럼 구한 그 집에서 아무런 짐도 없이 다 큰 남동생을 재우고 코트와 패딩을 이불 삼아 덮고 자면서 혹시나 들릴까 밤새 울었던 밤이었다.
그렇게 눈을 뜨고 나니 앞으로 먹고 살 걱정과 나를 이렇게 동생과 내던지고만 아빠의 초강수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때 내 나이가 고작 스물 대여섯이었다. 모아둔 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많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부모에게 손 벌리기 싫고, 오롯이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어서 나는 스무살이 된 후부터 최대한 경제적으로 독립하려 애썼다. 아무리 부모여도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싫어서. 부모님에게 손 좀 빌려도 됐을텐데 왜 그렇게 아둥바둥 힘들게 살았나 싶기도 하다.
뒤돌아 생각해도 징글징글하게 억척스러웠던 20대와 일에 미쳐서 앞만 보며 살았던 30대를 지나오고 나니, 그때 그렇게 살아서 지금 남들보다 조금 더 잘 살고 있는 내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살 길이 막막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던 여러 낮과 밤들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 동생과 함께 나누는 안줏거리가 되었다.
누군가처럼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어도, 한 때는 나도 동이 터오는 것이 힘들었고 도망가고 싶었고,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정신적인 자학을 하는 순간도 있었다. 나도 그랬다.
그러나 열심히 살았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내 스스로 나를 다독이고 보살피며 살지는 않았어도, 나는 내 인생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정말 열심히 커왔다. 위기의 순간에도 도망가거나 벗어나지 않고 뚝심 있게 버텼다.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든 나를 만들어보리라는 생각으로 이 바닥을 떠나지 않고 정신을 붙들었다.
모든 이들이 매순간 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지는 않는다. 내 인생은 내가 꽃밭으로 가꾸는 것이지 비교하며 후려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불행하게 살지 말고 버티며 열심히 살자. 그러면 온다, 순간의 행복을 즐기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매일 파도가 치밀고 바람 잘날 없는 이 바닥도 그런 정신으로 버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