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적인 어른이 되었다

by 전세화

- 더 이상 어리지도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나이


행복했던 중학교 생활은 어느새 끝에 가까워져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집과 가깝거나 자신이 진학하고자 하는 고등학교에 따라 희망서를 적어서 제출했다. 그렇게 우리들은 다른 고등학교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 나는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친구들과 떨어진 슬픔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새로운 환경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찼다.


고등학생은 중학생과 차원이 달랐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될 때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고등학생은 나의 삶 전체를 뒤바꿨다. 남들처럼 학교를 마친 후에는 수학학원을 갔다. 부모님도 나도 내가 수학학원에 가는 명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 했다. 그저 수학을 가장 못 했으니까, 남들도 다 가는 동네의 유명한 수학학원이었으니까 학교가 마치면 나는 수학학원에 갔다.


그 수학학원은 동네에서 유명했기 때문에 중학교 친구들의 대부분이 다녔다.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친구들도 서로 다른 교복을 입고 학원에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모두가 아직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었기에 각자 자신의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며 신기해했다. 학원 수업이 시작하기 전 빈 교실에서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떠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각자 자신의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고등학교에서의 첫 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그 빈 교실에서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은 나름 재밌었다. 우리 학교는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였기에 우리 학교에서만 하는 행사도 참여하고 점심을 먹고 나면 넓은 학교를 친구들과 산책하며 수다를 떠는 게 좋았다. 고등학교에 와서 새로 사귄 친구들도 좋았다. 여전히 중학교 친구들이 그립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과 친해지기 바빠 그리움은 또 금세 잊혔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해가 질 때까지 함께 자습을 하는 게 즐거웠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고 또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가는 생활이 여전히 피곤했지만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친구들과 자습을 하고 학원을 갔다 밤늦게 집에 가는 나 자신이 진짜 고등학생이 된 것 같아 뿌듯하고 좋았다.


중학교 친구들 모두 각자의 인생을 위해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그래도 고등학교 1학년때까지 시험이 끝나면 함께 만나서 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들의 단체 톡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렇게 모두가 자신의 앞날을 위해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갈수록 나는 공허해져 갔다. 나도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난 후에는 새로운 친구들과 좋은 추억들을 쌓느라 행복했다. 하지만 모두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다. 나는 아직도 미래보단 현재를 즐기고 싶은데 나와 함께 현재를 즐길 친구들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중학교와 달리 모든 것들이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학교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동아리를 창설해 주고 반장이나 부반장을 시켜줬다. 학교는 나름 공평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차별하지는 않았다. 학교는 자신의 생활기록부에 필요한 동아리를 창설하고 싶다면 계획서와 신청서를 작성해 신청하라고 하였다. 선생님의 권한으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반장과 부반장으로 뽑은 게 아니었다. 모두들 각자 공부하기 바빴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부도 잘하고 생활기록부도 열심히 챙기는 아이만이 반장 부반장 선거에 나가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모든 일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어느 누구도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만 빼고 모두가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직업이 무엇인지 알고 이에 맞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워 현재를 투자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어떤 미래도 결정할 수 없었고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모두 투자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앞을 향해 나아갈 때 나만 그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의미 없고 공허한 날들 속에 밝고 희망찼던 아이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고단한 날들에 어리광을 부리기엔 너무 커버렸지만 어른이 되기엔 아직 어린 나는 그저 삭막한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그 시절 내가 느낀 사회는 어떤 따스함도 남아있지 않은 냉정한 곳이었다. 2년 후, 1년 후 내가 있게 될 저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점점 이성적인 아이가 되어갔다.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들 중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직업과 관련된 학과를 선택할 수 없었던 내가 꿨던 꿈은 해외에서 공부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과목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삭막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서 교과서에는 없는 것들을 보고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유학은 현실적으로 내게 불가능했기에 내가 꿀 수 있는 꿈을 꾸었다. 대학교에 가기 위해 선택한 전공이 내가 정말 배우고 싶은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채 그저 그 대학교, 그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계획을 짜고 생활기록부를 작성하고 공부를 했다.


남들 모두 수능을 위해 준비할 때 운 좋게도 나는 대학진학박람회에서 내가 진짜 공부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찾았다. 그렇게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무한정으로 믿고 지원해 주시는 어머니를 등에 업고 지금까지의 모든 계획을 엎고 새로운 계획을 짰다. 학교 공부와 함께 생각 지도 못한 토익 공부를 병행했다. 학교 선생님들도 모르는 진학 정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들 지금 준비하면 재수를 하게 될 거라고 일단 내가 갈 수 있는 다른 학교도 지원하고 다른 대학교에 들어가서 편입을 하라고 말했다. 나와 어머니의 귀에는 다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에게 재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편입도 없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꿈을 찾았는데 편입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의 만류와 저주 속에 오직 내가 원하는 대학교 하나만을 지원했다. 나는 반년 만에 모든 계획을 바꾼 후 재수하지 않고, 편입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즉시 내가 진짜 가고 싶은 대학교에서 내가 진짜 배우고 싶은 학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어머니는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가 앞으로 어떤 직업을 평생 하고 싶은지 모르고 배우고 싶은 학과와 가고 싶은 학교를 선택할 때보다 나의 결정에 확신했고 나의 계획이 성공할 거라 믿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빙자한 저주에도 무너지지 않고 나를 지지해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그때의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 어른으로서 새로운 출발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 방황했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기적적으로 나의 꿈을 찾았고 그 제서야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현재를 투자했고 원하는 것을 이뤄냈다. 좋은 출발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하지만 세상은 나의 새로운 출발에 새로운 시련을 던져 주었다. 고등학교를 마무리할 무렵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모두가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다른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금방 사그라들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점점 심해지는 코로나 때문에 나는 십 대의 마지막 졸업식을 반에서 티브이를 통해 치러졌다. 그건 앞으로 일어날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는 내가 기대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없었다. 20살이 된 새해 어른이 된 기념으로 주민등록증을 들고 혼자 집 앞 편의점에서 아버지의 조언을 받아 사온 맥주가 다였다. 그 후로는 내가 어른으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없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신선했다. 집에서도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처음엔 편리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우리 집 누구도 함부로 밖을 나갈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모두 예민해졌다.


우리 가족은 틈만 나면 별거 아닌 일에도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우리는 집안에 갇혀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며 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었다. 대학교에 가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 기대했던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이 없다. 고등학생 때처럼 매일이 반복되는 숨 막히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집 밖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나의 첫 대학 생활은 그렇게 감옥에서 보냈다. 새로운 꿈과 함께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희망차게 열게 될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나는 그렇게 다시 꿈을 잃은 현실적인 어른이 되었다.




- 생각보다 너무 빨리 되어버린 진정한 어른


코로나는 우리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의 생계를 뒤흔들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던 그때 아버지도 실직의 위기에 놓이셨다. 회사에서는 아버지께 퇴사에 대한 압박을 가해왔고 집에서는 집 한 채 값을 하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딸이 아버지의 목을 조였다. 그렇게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돈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매일 집에 오시면 손에서 술을 때지 못하셨다. 하루 종일 집에 박혀 강의를 듣고 과제만 하던 나에게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또 다른 감옥이 되어 나를 옥죄었다. 그렇게 나는 남들 다 하는 아름다운 청춘을 보낼 수 없음에 억울했고, 아버지는 어떤 선택도 자유로이 할 수 없는 현실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원망스러웠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우린 서로를 죽어라 탓했다,


나는 매일 어머니와 머리를 싸매며 돈 계산을 해야 했다. 매일 밤 나의 꿈이었던 대학교를 졸업도 못하고 그만두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아버지를 원망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반년 동안 살얼음 위를 걸었다. 어느 누구도 집에서는 숨도 편하게 쉴 수 없었다. 다행히 이 지옥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모두가 끝나지 않는 전염병에 적응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조금씩 사회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다음 학기가 되어서야 나는 대학교 강의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돈이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던 코로나 덕분에 아버지는 조금만 코로나가 다시 심해지면 회사의 압박을 받았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나는 대학을 어떻게 졸업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만 했다. 한국 캠퍼스에서 미국 캠퍼스에 가는 데는 정말 많은 돈이 들었다. 한국 캠퍼스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어느 한국 대학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부모님 등골이 휘어지는 학비였지만 미국에 있는 캠퍼스를 다니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방학도 없이 수업을 듣고 매 학기 내가 들을 수 있는 학점들로 시간표를 꽉꽉 채워 넣으며 겨우 반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내가 스스로 학비를 충당할 수 없었기에 나는 시간을 벌었다. 그럼에도 엄청난 학비를 감당하기에는 부모님의 등골이 이미 남아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미래를 내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데 투자받기 위해 이기적인 어른이 되었다. 지금 포기한다면 지금까지 겨우 겨우 버텨온 시간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대학을 졸업하기 위한 힘이 없었기에 뻔뻔하게 부모님께 기생했다. 그렇게 나는 현실적이고 이성적이고 이기적인 어른이 되었다. 힘들게 얻어낸 대학 졸업장은 비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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