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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에는 메일을 쓰지 마세요

독일직장 근무시간

by 가을밤

두 차례의 이직을 거쳐 독일회사에 입사했을 때, 뭐든 실수 없이 잘 해내고 싶었다.


우리 부서는 독일, 덴마크, 스페인 출신의 직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아시아인은 내가 유일했다. 당시 부서가 예산, 공문서 등 다소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 부서이기도 했고 혹시 독일 직장문화를 몰라 오해를 살 까봐 메일 마지막 줄의 인사말까지 꼼꼼히 읽었다.


노트북과 함께 회사 핸드폰도 지급되었는데, 한국 직장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이건 '24시간 대기'하라는 무언의 신호인 것 같았다. 핸드폰만 줬지 독일회사도 공사구분이 없이 다 똑같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저녁 10시, 퇴근 후 한참이 지난 시각이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매니저가 보낸 메일이었으며 메일 말미에는 '확인을 부탁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책상에 앉았고 약 30분 간 업무를 보았다.


다음 날 오전, 매니저에게 팀스(MS Teams)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제 준 자료 수정할 게 있나 보다. 아니면 뭐가 잘못됐나? 걱정이 앞섰다.


매니저는 간략한 아침인사에 이어 말을 이어갔다.


"어젯밤 10시 반에 메일 썼어요? 왜요?"


마지막 왜냐는 물음에 나는"왜라니 무슨 말씀이시죠?"라는 말 외에 다른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메일을 봤으니 답한 것이고, 당신이 확인해 달라고 했으니 확인해 준 것이라고 했다.


매니저는 그제야 내가 자기의 질문을 오해한 것을 깨닫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 뜻이 아니라 어째서 밤 10시에 일을 하냐고요. 퇴근 후 시간은 본인 시간입니다. 나는 낮시간에 아이들 때문에 업무를 못 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애들이 밤에 잠들고 잔업을 하는 것뿐이에요. 바로 답장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에요. 다음 날, 혹은 천천히 답해줘도 돼요. 낮에 8시간 근무했으니 더 이상 하지 말고 쉬세요. 충분히 쉬어야 다음날 업무 효율이 오릅니다."




한국서 대학 다닐 때 알바를 하고, 직장인이 되어 독일 내 한국회사를 다닐 때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여긴 누가누가 더 오래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나를 일 잘하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지 않았다. 야근하는 사람을 성실하기보다 오히려 비효율적이라 야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회사가 먼저, 다음 날 업무효율이 떨어진다고 퇴근 후엔 업무에서 멀어지기를 권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과 사가 섞여 제대로 쉬지도, 일도 못 한다는 게 회사의 원칙이었다. 직원의 성실성은 업무 결과로 판단하면 되는 거였다. 근무시간 내에 연락 잘 되고 맡은 업무를 깔끔하게 해내는 게 곧 성실함이었다.


초과근무(야근) 역시 업무가 많은 기간엔 가능하지만, 하루 2시간을 넘기면 안 된다. 독일 노동법상 하루 근무시간은 8시간이며 불가피할 시 10시간까지 허용하되, 초과된 2시간은 반드시 나중에 직원이 휴가로 쓸 수 있게 해 주거나 돈으로 지불해야 한다. (포지션에 따라 주말근무하는 곳이 있다. 그런 경우 다른 날 쉬게 해주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밸런스를 맞춰준다).


독일 내 한국회사들은 이 규정을 알면서도 무시하거나 10시간이 넘어가면 퇴근으로 위장하여 야근을 시키는 일도 잦았다. 한국회사에서도 독일 노동법과 계약서를 지켜달라고 했던 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상사에게 눈엣가시였는데, 독일회사로 오니 이게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던 거다. 맞아, 어차피 안 지키려면 계약서는 왜 쓰고 법은 왜 필요한가.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야 맞는 건데.


그렇게 나는 워라밸을 보장해 달라고 외치지 않아도 자동으로 워라밸이 보장되는 직장의 일원이 되었다.



제목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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