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

by 라이프스타일러

직장생활을 가만히 돌아다 본다. 시간이 길었던 만큼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던 이들이 있다. 역으로 상처를 받았던 기억도 있다. 의도적이었던 업무적이었던 그렇게 떠오르는 사람이 아른아른한다. 미성숙했던 자신이 가장 큰 원인이다. 같은 곳에서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들조차 서로 생각이 다르다. 어떤 때는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오히려 생각이 같은 이도 있다.


아무리 곱씹어 봐도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람과의 관계가 아닌가 싶다. 사람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 한다. 인성이라는 것이 노력을 한다고 해서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미 잘못한 것까지 용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본래 용서라는 것이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권리이고 보면 상처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처도 받고 용서도 해줘야 하는 매우 부당한 일이기도 하다.”


용서를 구해야 하고 용서를 해야 한다.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가해자가 되고 또 누군가로부터는 피해자 될 수 있다. 조직은 자연인처럼 인격이 있다. 그렇지만 유기체로 규정된다 하더라도 조직이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다.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고 갈등이 증폭되기도 한다. 다니기 싫은 직장을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것은 죽음보다 힘든 일이다. 꼬여 버린 직장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직장인은 평생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직장이란 직장인에게는 자신의 삶을 지지하는 기반이다. 소중한 공간이 삶을 받쳐 주기는커녕 상처만 주는 경우도 있다. 암울한 직장생활은 참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견딘다고 견뎌지는 것도 아니다. 이겨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가적 가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가정과 회사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직장인에게 강요되는 선택은 항상 일방적이다. 제로섬 게임과 같이 어느 한 쪽은 반드시 희생을 해야 하는 고통스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고통에서 선택되는 것은 언제나 회사였다. 가정을 위해 가정을 포기하고 회사에 머무는 것을 선택한다. 회사를 포기하면 곧바로 가정도 포기되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선택의 강요는 삶을 지쳐가게 만든다. 일과 가정의 양립을 통해 직장인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 가고 싶다. 직장인의 안정된 삶은 곧 그 사회의 안정이며 직장인의 행복은 곧 그 사회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삶에 생채기가 날 수는 있다. 조직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직의 거대한 힘에 밀려나는 나약한 인간으로써 겪는 고충은 어디에나 있다. 조직이 인간을 품고 생채기를 달래 주어야 한다. 조직의 문화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사람을 통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 조직이 사람을 위한 힘을 갖도록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리더에게서 시작되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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