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빈 Sep 19. 2024

스타일은 달라도 우리, 아름다운 향기로

#같은 품종 다른 느낌 #옛날 친구 #서로 달라도 매력있게

포도는 같은 품종이라도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밭에서 자라는데도 몇 미터 거리에 따라 차이가 나기도 해요. 같은 품종으로 만든 구세계 와인과 신세계 와인은 그 스타일과 매력이 다릅니다. 


중학교 친구 얘기를 했더니 듣고 있던 후배가 놀랍니다. 아직도 연락을 나누는 게 신기한 얼굴입니다. 저의 가장 어린 시절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입니다. 자주는 못 만나요. 그래도 어제 본 듯 새삼스럽지 않고 나눌 이야기가 늘 많아요.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가 다음에 어느 맛집에 가자는 약속이 아니라 건강하게 잘 지내라는 것에서 세월을 느낍니다.


동창회나 학창 시절 친구 모임이 부담된다는 사연이 심리상담하는 유튜브에 종종 올라옵니다. 어릴 때는 정말 친하고 좋았는데 언제부턴가 함께하는 자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거예요.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한 소중한 인연이니 연락을 유지하고 싶어 정기적으로 모임에 나가지만 매번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 이 만남을 지속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연입니다. 상담의 결론은 모두 같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고요.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전 친구의 비중이 점점 낮아지는 건 나이 들면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현재의 자신과 교집합이 줄어드니까요. ‘자신의 유년기’를 함께 보낸 친구보다 ‘아이들의 유년기’를 함께 보낸 조리원 동기와 할 얘기가 더 많고 정서적인 공감도 더 큽니다.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만난 고등학교 친구가 있습니다. 안 본 사이 친구는 세월을 아름답게 보냈습니다. 비영리기관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며 소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지 한참인 두 사람이 수다 삼매경에 빠지면 어린 시절에 쓰던 은어가 나오기도 하는데 얼마나 정겨운지요.


각자의 삶을 살아온 친구와 저는 서로의 인생을 들을 때마다 신기하고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세월의 간극을 체감하는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식성입니다. 건강 상의 이유, 습관, 취향이 반영된 우리의 식성은 상당히 다른 코드를 갖고 있어요. 한 번씩 돌아가면서 서로 좋아하는 쪽으로 정하니 괜찮습니다. 친구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네 하는 마음으로 나가니 이 또한 좋습니다. 가장 맛있는 식사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이니까요. 


잊고 있던 학창 시절 친구가 생각납니다. 아홉 살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는 종이로 만든 건반 위에서 동요를 연습하고, 멜로디언으로 아쉬움을 달랬죠. 근처 삼촌댁에 놀러 가면 피아노가 있었지만 눈치도 보이고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아 멀리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갖게 되자마자 바로 산 악보책이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소품집이었어요. 카세트 테이프로 듣던 곡을 제가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Thanksgiving은 늦가을의 고독한 서정을 담아서, Joy는 5월의 맑은 하늘과 바람으로 연주했어요. 그중에서도 하나의 작품을 연주한 듯 가장 큰 충족감을 주던 곡이 있습니다. 1년 전 곁을 떠난 친구, 조지 윈스턴이 남겨준 어린 시절의 추억과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이 떠오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jYecEQFL0U

Canon in D (Pachelbel), 레이어스 클래식



이전 02화 상처를 꽃으로 돌려주는 자연 앞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