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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세영 Oct 22. 2023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0-9. 흰 종이와 연필을 들고

한동네에서 계속 살기를 24년, 나는 삼전동에서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갈 수 있는 동네로 이사 왔다. 늦은 시간까지 여는 음식점들, 한 골목길에 3개나 있는 편의점, 새벽까지 붉게 빛나는 십자가를 내세운 교회가 내가 보는 동네의 첫 모습이었다. 바로 옆 동네인지라 거리의 풍경도 익숙하고, 횡단보도를 경계로 다른 동네가 시작된다는 느낌도 없어 쭉 한 동네에 살아가는 중이라 느끼고 있지만, 점차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곳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옆 동네로 이사를 와 비슷한 동네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지만, 만약에 내가 더 먼 곳으로 가게 된다면 내가 기억하는 삼전동은 저 멀리 마음속 깊은 곳으로 사라지진 않을까? 내 머릿속에서 동네에 대한 추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글로 써보고 내가 볼 수 있게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마음을 다잡고 펜을 잡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재빨리 흰 종이를 들어 내 머릿속의 동네를 그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를 회상한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상상으로 몇 번 기억 지도를 그려본 적은 있었지만, 손으로 끄집어내 본 적은 없었기에 생각보다 어려웠다.

기억 지도 프로젝트 시작.

나만의 동네를 한 장 그려 놓으니, 생각보다 다양한 장소에서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개의 장소에서의 파편적인 기억들뿐이었다. 한 동네에서 오랜 기간 지냈으니 기억하는 장소도 그에 비례해 늘어날 거라는 생각은 나에게는 틀린 생각이었다.


내가 긴 시간 살아오고 있는 동네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눈으로 확인하자, 다른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각자가 생각하는 동네의 일부분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면, 그 전에 내 기억을 정리해서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무작정 노트북을 펼쳐 지금 타이핑해 나가는 중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10개의 글을 마무리했고, 이를 모아 ‘기억 지도 프로젝트’의 프롤로그로 삼으려고 한다.


지인부터 시작해서, 여러 명의 인터뷰를 모을 예정이다. 내가 했던 것과 비슷하게 흰 종이와 볼펜 한 자루를 쥐여 주고,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보게 한 다음,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가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보여주려 한다.


내가 기억하는 장소에 대한 기록은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내가 써 내려간 글을 보며 자신의 동네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삼전동이라는 하나의 동네를 넘어, 여러 동네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고 이것이 모여 변화해 온, 앞으로 변화해 갈 서울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 되었으면 하는 큰바람이 있다. 동네 주민들의 개인적인 기억을 모아 공동의 기록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끝내려 한다.


흰 종이 위에 연필로 내가 생각하는 동네를 그려보자. 어디서부터 시작하든 상관없다. 가장 기억이 남는 장소부터 그려 나가면 된다. 그래, 집부터 시작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낸 곳인 만큼, 추억도 많이 남아있는 공간일 테니 말이다. 점차 주변으로 퍼지듯이 내 동네를 훑어보자. 골목에서 있었던 사소한 일, 공원에서 본 것들 하나하나가 흰 종이를 채워 나갈 것이다.


다 그렸으면,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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