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아파트 단지와 할아버지 댁
2006년에 잠실주공 4단지가 레이크팰리스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하고, 내가 8살이 되는 시기와 맞물려 새롭게 단장한 초등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할아버지가 빌라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가시면서 아파트 단지에 대한 기억이 시작되었다.
단지 안을 걷다 보면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았다. 깔끔한 타일이 깔린 바닥과 양 옆에 높게 솟은 아파트. 너저분한 골목길 사이를 가까스로 지나가는 자동차와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닌, 한껏 정돈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주변 놀이터에서 놀거나 학교 앞에 있는 인공 연못의 정자에서 놀곤 했는데, 그 옆에는 낮이건 밤이건 항상 개구리 울음소리가 퍼졌다. 어릴 적에는 개구리가 끊임없이 우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개구리 소리가 담긴 BGM을 스피커로 반복 재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미끄럼틀 위에서 눈 감고 좀비 게임을 하거나 경찰과 도둑이라며 온 곳을 뛰어다녔는데, 놀이터마다 놀이기구도 다양하고 각자의 컨셉이 있어 매일이 새로운 나날들이었다. 각 놀이터에는 자동차, 사과, 도마뱀과 같이 우리가 붙인 이름이 있었는데, 약속장소의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재밌게 시간을 보냈던 그때가 아직도 그립다.
할아버지는 아파트 단지의 끝자락에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셨는데, 그 집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듯한 공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널찍한 현관이 있고, 현관에서 거실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현관에서 안쪽으로 나 있는 공간을 따라 들어서면 할아버지가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고, 왼편에는 거실이, 오른편에는 방 2개와 화장실이 있었다.
거실 왼편엔 널찍한 주방이 있었고, 그 옆에는 드레스 룸과 안방이 있었는데 화장대가 있는 자그마한 복도가 그 사이를 연결해주고 있었고 자그마한 화장실이 딸려 있었다. 드레스 룸에는 예전부터 사용하시던 자개장이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당신이 애용하시던 패션 용품인 볼로 타이와 플랫 캡, 그리고 페도라가 걸려 있었다. 밖에 나갈 일이 생기시면 항상 모자를 쓰고 여러 색의 볼로 타이를 번갈아 매고 나가셨는데, 그 때문인지 내가 생각하는 할아버지는 항상 멋쟁이였다.
안방에는 빌라에서 가져온 작은 TV가 있었다. 명절 기간에 사촌들과 함께 할아버지 댁에 모이면 차례를 지낸 뒤에 동생들과 함께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특선 영화를 보곤 했다. 그 너머로는 다용도실이 있었는데, 창문을 열면 안방에서 다용도실까지 창틀을 밟고 넘어갈 수 있어 종종 침대를 밟고 다용도실로 넘어가는 장난을 치곤 했다.
거실 너머에 위치한 두 개의 방 중 거실에 가까운 곳엔 CD 플레이어와 스피커, 그리고 여러 클래식 CD들이 있었다. CD 플레이어가 들어있는 유리장에는 양 눈이 빨갛고 파란 남자의 사진이 붙어있어, 볼 때마다 께름칙했다.
끝에 붙어있는 방은 할아버지가 읽으신 신문을 모아두는 방이었으며, 바둑판과 바둑알, 그리고 장기알을 보관해두기도 했었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종종 바둑판을 들고 나와 할아버지와 바둑이나 장기를 두곤 했는데, 한 번도 할아버지를 이겨본 적이 없었다. 한 번은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장난으로 두었던 장기 규칙을 들고 와 단숨에 할아버지의 말을 잡아냈지만, 당신께서는 이게 무슨 엉터리 규칙이냐며 한 소리 하셨다. 상대와 나의 졸이 움직여 공간을 터주면 차를 한 번에 ‘ㄱ’ 자로 움직여 장군을 잡을 수 있다는 규칙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가 없다.
집에 들어서면 거실에 항상 TV를 켜 두신 채로 신문을 읽고 계셨는데, 넓은 곳에서 혼자 지내셨기에 TV 소리와 신문 넘기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는 것을 좋아하셔서 당신 옆에는 신문이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신문을 읽으시곤 했는데, 당신의 오른편엔 아이들이 쓸법한 푸른색의 낮은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그 위에는 작은 해면기가 있어 신문을 넘기실 때 종종 손가락에 물을 묻혀 넘기곤 하셨다. 당신께서 신문을 읽으실 때 뒤쪽 소파에 올라가 얼마 남지 않은 희끗한 머리카락을 만지며 놀곤 했다.
TV 왼편엔 전시에서 사 오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모조품이 있었고, 그 앞에는 내가 초등학생 때 그렸던 CASS 정물화가 놓여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앤틱 장식장엔 당신께서 해외여행에서 가져오신 물건들과 유람선 및 비행기 모형, 빈 양주병이 가득했는데, 할아버지 옆에 있다가 지루해지기 시작하면 장식장 너머의 전리품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실 창 너머로는 롯데월드가 한눈에 보였는데,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 되면 놀이기구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고 봄맞이 축제를 하는 날에는 초청 가수들의 노래를 소파에 앉아서도 감상할 수 있었다. 월드타워가 지어지는 모습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높아지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저녁 시간대가 되면, 석촌동 뒤편으로 지는 해가 창 너머로 들어와 거실을 온통 따뜻한 색으로 물들였다. 그럴 때면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도 하나의 장식처럼 보였다. 거실 창가 앞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그 온기를 느끼고 있으면 저절로 졸음이 쏟아졌다.
초등학교도 졸업한 지 오래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신 지 몇 년이 된 지금은 아파트 단지에 이전처럼 많이 가지 않는다. 잠실역에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거쳐 가곤 하는데, 생각이 많아질 때면 할아버지 댁 앞에 있는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들어간다. 다른 놀이터와 다르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미끄럼틀이 있는 그곳은, 한쪽에 그물망이 있어 그 위에 올라가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곤 한다. 등 뒤의 그물망이 주는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시간은 어느새 훅 지나가는데, 그러고 나면 복잡한 생각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써보고 나니 아파트 단지보다 그 안에 속한 할아버지 댁에 대한 추억이 훨씬 많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등교 및 하교 시간을 제외하면 단지 내에 들어오는 것은 할아버지 댁에 가기 위함이었다. 조용한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시간은 하나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