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집 앞에 있던 태권도장
건물 입구에 서자마자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기합 소리. 3층으로 올라갈수록 커지는 그것은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는 한 아이에게 떨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문을 열고 멀뚱멀뚱 서있는 나를 바라보는 열댓 명의 아이들.
태권도장에 들어선 나에게 집중된 이목은 뒤로 돌아서 다시 나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상기된 얼굴로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입구와 정반대에 위치한 관장실로 들어가는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정말 긴 시간으로 다가왔다.
태권도장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이렇듯이 쉽지 않았다. 신발을 벗어 맨발인 데다가 빳빳한 도복의 질감은 나 혼자 다른 세상에 벌거벗은 채로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허리춤에 단단하게 맨 흰색의 띠는 이제부터 여기의 일원이라는 듯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익숙해진 것은 어느 땐 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도장을 꾸준히 나가다 보니 주변 아이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면서 스며든 것 같다. 도복을 입고 띠를 맨 채로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 두 블록만 걸으면 도장이었는데,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어 왔다 갔다 하기 정말 편했다.
허리춤에 맨 띠가 하늘하늘해지고 도복도 빳빳함이 다 빠질 즈음, 태권도장에 가는 것은 이제 하나의 일상이었다. 태권도장의 이름이 새겨진 승합차가 1층 주차장에 도착하면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관장님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이 도장에 전부 들어오면 적막했던 공간은 금방 시끌벅적 해졌다. 입구를 바라보고 몇 명씩 오와 열을 맞춰 앉아있으면 사범님과 함께 문 위의 태극기에 묵념을 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요즈음 SNS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태권도장은 아이들 돌봄 교실이라는 말이 종종 보이곤 한다. 맞벌이로 바쁜 부모님 대신 아이들을 맡아주고 여러 육체적인 활동으로 아이들의 체력을 다 빼놓아서 집에 들어간 아이들을 곤히 잠에 들게 해 준다는 게 그 이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다닐 때에도 태권도만 배운 게 아니라 별개의 프로그램이 병행으로 돌아갔었다. 매주 요일을 정해 놓고 태권도를 배우는 대신 생활 체육을 진행하거나 아주 가끔 토요일에 도장의 불을 전부 끄고 벽에 딸린 TV에 영화를 틀어 놓기도 했는데, 그런 날이면 모두가 과자를 가져와 나눠 먹곤 했다.
정권 지르기와 발차기를 배우는 시간보다 생활체육을 하는 시간이 더욱 기다려지곤 했는데, 도장의 양 끝에 간이 골대를 두어 돌아가면서 축구를 했던 기억이 있다. 한 번에 축구를 하기엔 인원이 많아 몇 개의 조로 나누고 토너먼트 식으로 돌아가며 진행했는데, 푹신한 마룻바닥 재질의 바닥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리 팀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하나의 추억이었다.
도장에서의 활동도 그 당시 우리들의 체력을 다 빼놓진 못했는지 수업이 다 끝나면 친구들과 밖으로 뛰어나와 온 골목을 누비곤 했다. 허리춤에 매고 있던 띠를 벗어던지고 도복을 펄럭이며 뛰어다니면 시끄럽다는 듯이 쳐다보는 어른들이 있었지만, 그때의 우리는 남의 눈치를 보는 나이가 아니었다. 띠를 반으로 두 번 접어 끝을 잡고 양쪽으로 잡아당기면 팡- 하는 큰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좋았던지 도장 밖에서는 항상 그러고 다녔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승급 심사를 보았는데, 흰 띠에서 벗어나 노란 띠를 허리춤에 맸을 때의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띠의 색깔을 점차 바꿔 나가는 것은 게임에서 미션을 하나씩 클리어해 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에는 품띠와 검은띠를 매고 있는 형, 누나들이 세상에서 가장 멋져 보였다.
어느새 시간도 많이 흘러 품띠를 달아야 할 때가 왔을 무렵, 우리는 관장님이 모는 승합차를 타고 국기원에 가서 승품 시험을 보았다. 여러 도장에서 모인 사람들로 가득 찬 국기원은 엄청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시험을 보는 장소라는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경기장을 둘러싼 관중석의 모습은 흡사 투기장과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 나에겐 크나큰 떨림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씩 겨루기를 하러 내려가는 것을 구경하며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정말 한세월이었다. 내 차례가 되고 나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겨루기를 마치고 나니 심사가 끝났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었다.
품띠를 달았을 때가 초등학교 중반이 지났을 때였다. 슬슬 머리가 커져 주일마다 나가던 교회 활동도 귀찮아지기 시작하고 학원을 다니는 것도 지겨워질 무렵, 태권도장에 가는 발길이 차츰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도장을 그만두었고, 그 시간에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수업을 듣거나 미술 음악 종합 학원을 갔었다.
그 시절 남자아이들이면 한 번은 간다는 태권도장은 또래 아이들과 움직이며 시간을 보냈던 만큼 다른 곳보다 많은 추억이 있었다. 도장은 지금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여름이 되어 창문을 연 채로 수업을 하는 날이면 아이들의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재작년 이맘때쯤 아이들을 태운 승합차에서 관장님이 내리시는 것을 봤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도장을 지키고 계신 듯했다. 오늘도 삼전동의 한쪽은 태권도장에서 나오는 소리로 채워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