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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카혼타스 Oct 22. 2023

나는, 책 읽는 사람

책 추천 요청을 꽤 받는 편이다. 책 읽기란 모름지기 혼자서 은밀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자투리 시간밖에 내지 못하는 나는 늘 주변에 책을 늘어놓고 산다. 사무실 책꽂이 한편에는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읽는 책 2~3권이 꽂혀 있고, 차 조수석에도 항상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 여러 권 있어서 지인들은 자연스레 뒷좌석으로 탄다. 책 많이 읽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이렇게 쉽게 만들어진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었지만 10여 년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암흑의 20대 시절도 있었다. 첫 아이를 낳고 육아를 책으로 공부하던 시절부터가 본격적인 책 읽기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제목에서부터 ‘육아’, ‘아이’, ‘부모’를 내세우는 육아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급변하는 육아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책이 쏟아졌고, 읽고 또 읽어도 책은 넘쳐났다. 아기가 옹알거릴 때는 아기 감정 읽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읽었고, 책 읽는 습관을 기르고 싶을 때는 책육아 방법서를 찾아 읽었다. 행복지수를 높여준다는 북유럽 육아책에 푹 빠져 있던 때도 있었고, 질문하는 힘을 길러준다는 하브루타 육아서도 여러 권 읽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현직 초등교사가 썼다는 학교 적응을 위한 안내서와 공부비법 책까지 읽고서야 아이의 입학 준비를 완벽히 끝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둘째 아이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퇴직 전 마지막 휴직이라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아까웠다. 아이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만이라도 오로지 나를 위해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두 아이가 학교로 가고 나면 집을 간단히 정리하고 나는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그날그날 손 가는 대로 고른 몇 권의 책을 빌려서 도서관 앞 단골 카페 2층 자리에 앉으면 새로운 하루가 내게 주어지는 것 같았다. 시기마다 제때 피어나는 창밖의 꽃도 예뻤고 그 꽃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들도 예뻤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았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았고, 흐린 날은 또 그 나름대로 괜찮았던 매일매일이 좋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육아서만 읽어서인지 아니면 두 아이를 키우며 어느 정도 육아 고수가 됐다는 자만심이 생겨서인지 모르겠다. 매일 도서관에 다니다 보니 세상에는 참 다양한 책이 많았고, 이제는 육아책 말고 다른 책이 더 읽고 싶어졌다.

여행 관련 책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떠나는 삶을 꿈꾸는 게 당연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반쪽짜리 자유였다. 초등학생은 늦어도 오후 3시면 집으로 돌아온다. 전국 방방곡곡, 전 세계 소도시를 책으로 여행했다. 책육아에 이은 책여행의 시작이었다. 

한동안 여행서에만 심취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양미술, 건축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자연스레 인문학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여행서를 읽을 때만 해도 내 관심사가 육아에서 여행으로 옮겨간 줄 알았는데, 다양한 인문 서적을 읽으면서 나만의 육아 원칙과 가치관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모든 책이 삶의 지혜와 태도를 말하고 있었고, 내 삶도 그에 따라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더불어 점점 더 완벽한 진짜 엄마가 되고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육아가 아닌 학업이나 취업 준비 또는 이직 문제 등을 고민했다면 책을 통해 얻는 것들도 다른 종류였을 것이다. 비록 마지막 휴직을 즐기며 나만의 시간을 간절히 바라던 시기였음에도 그때 나에게 가장 중요했고 잘하고 싶었던 것은 단연 육아였다.

인문학의 세계에 한참을 빠져 살다가 습관, 몰입, 시간 관리 등에 관한 자기계발서를 지나 재테크 투자법에 입문할 즈음 1년간의 휴직이 끝나가고 있었다. 출근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암울하기만 했던 그때, 당신도 파이어족(FIRE :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 경제적 자립을 통해 빠른 시기에 은퇴하려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책이 내 눈에 들어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재테크 책도 나에게는 육아 지침서였다. 경제적 자립과 조기 은퇴도 나 혼자만을 위한 일이 아닌 가족과 함께여야만 의미 있는 일이었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목표였다. 다양한 재테크 책을 읽으며 아이들의 금융 이해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고 조기 경제교육을 고민했다.  

복직 후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에도 이미 습관이 돼버린 책 읽기는 멈추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몇 장 밖에 못 읽는 날은 있어도 한 장도 안 읽는 날은 없었다. 자연스레 주변에 책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20분 이상만 보장된다면 무조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원래도 비문학을 더 좋아했던 나였는데,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으면서부터는 긴 흐름의 소설을 읽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등장인물이 많고 외국어 이름이 비슷비슷했던 어떤 소설은 이어서 읽으려고 할 때마다 앞장으로 돌아가서 이 사람이 그 사람이 맞는지, 서로의 관계가 어땠는지를 다시 찾아 읽어야 해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음식도 채소보다는 고기를, 면보다는 밥을 압도적으로 좋아하는 나는 점차 비문학만을 지독하게 편독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큰아이가 중학교 2학년, 작은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인 지금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한 해 한 해 아이들이 커갈수록 나에게는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더 이상 읽고 있는 모든 책을 육아서로 만들지 않는다. 한 분야의 책에만 몰두하지도 않고, 소설도 읽어보려 노력한다. 도서관에 가면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종합자료실 신간 코너로 향하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의식적으로 어문학실을 먼저 들러본다. 다섯 권 중에서 한두 권은 소설 중에서 골라 대출하고, 다른 책보다 먼저 읽어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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