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준우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느긋하지만 무겁지 않게 무심한 듯 따뜻하게. 아이의 숨소리에 맞춰 일정한 속도로 토닥토닥 손을 움직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를 불렀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지혜가 아이보다 작았을 때 엄마가 불러주었고, 엄마가 그만큼 작았을 때 엄마의 엄마가 불러주었을 노래를 그녀도 아이에게 불러주었다. 준우는 더 이상 자장가가 필요 없을 만큼 자랐지만, 박자에 맞춰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던 것이 어느새 쌕쌕 소리를 낸다. 눈동자를 덮은 옅은 눈꺼풀 안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입꼬리가 조금씩 씰룩거린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스마트폰을 꺼내 게시판을 쭉 훑어봤다. 어둠 속에 들리는 아이의 숨소리는 안정감을 준다. 공기 중에 뿌려지는 가습기의 소리 같은 편안함이다.
‘귀에서 피 날 것 같음.’
누군가의 글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마음 조금은 알 것 같으니까. ‘그래도 부럽네.’ 종일 재잘대는 아이의 소리가 버거울 정도인 누군가의 일상은 종일 아이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워킹맘에게는 사치였고 동경이었다. ‘저는 직장맘이라 님이 조금 부럽기도 해요. 뭘 위해 아등바등 사는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를 그만두는 상상을 한답니다’ 그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미안한 마음에 잠든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만져보다 스르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헉’ 소리와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옆에 누워있던 준우는 이불을 걷어찬 채 참외 모양의 귀여운 배꼽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깊은 잠에 빠져있었고,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남편의 코 고는 소리는 이미 꺼져버린 가습기 소리를 대신했다. 깜빡 잠이든 줄 알았는데 푹 잤나 보다.
‘자면 안 됐는데.’
좀비 같은 몰골로 부스스 일어나 방에서 빠져나오니 남편의 우렁찬 코 고는 소리와도 거리가 벌어졌다. 이런 소리에도 깨지 않는 아이가 신기하다. 뭐, 백색소음 이런 느낌인가?
사막의 밤처럼 평온했던 방 안의 풍경과 달리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주방과 거실은 지금도 누군가 열심히 움직이고 있을 것 같다. 그 누군가를 만들어 내기 위해 분신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무거운 몸을 움직여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건 지혜 본인이었다.
‘과학자들은 뭐하나, 집안일 하는 로봇 좀 만들어 주지.’
저녁을 먹고 정리를 하지 못한 식탁은 음식 찌꺼기들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손톱으로 긁어내도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밥 먹고 나면 바로 싱크대에 넣어 두라고 했는데, 엄마 말 좀 들을걸. 후회할 틈도 없이 거실 한 편에 쌓여있는 빨래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널브러져 있는 옷들이 조금 전의 그녀처럼 부스스 몸을 일으켜 사람의 형태로 돌아다닐 것 같은 기괴한 상상도 했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집 정리를 해야 하는 지혜에게는 그런 괴물이라도 필요했다. 그 괴물이 집 정리 좀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지나가는 똥개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도 체력도 없다. 잠이 덜 깬 머리는 몽롱했지만, 손은 빠르게 움직여 뒤엉켜있던 빨래를 각자의 자리에 가져다 놓고 아이의 방과 거실을 정리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잠바를 옷걸이에 거는 동안 구석에 숨겨놓은 과자 봉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하나도 모르겠다며 별표만 잔뜩 쳐 놓은 학습지는 책꽂이에 바르게 꽂았다. 알림장을 확인하고 학교에서 만들어 온 작품을 감상했다. 음, 예쁜 쓰레기 추가. 택배 상자에서 주문한 물건을 꺼내 필요한 곳에 정리하고 돌아서니 싱크대에서 몸을 풀고 있는 그릇들이 생각났다. 식기세척기를 구매한 몇 년 전의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릇들을 건져 올렸다. 후드득 떨어지는 물방울과 음식 찌꺼기가 지혜의 기분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
환청인가? 한 번 잠이 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준우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는 작은 바람에도 힘없이 굴러가는 꽃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다. 이마를 짚어보는 순간 불안한 마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스마트폰 불빛의 위로를 받으며 체온계를 아이의 귀에 꽂아 넣었다. 선명한 38.9도. 망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해열제가 종류별로 섞여 있었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준우의 입에 털어 넣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며 평소의 저녁 풍경처럼 준우의 몸을 토닥였다. 노랫말 가사처럼 스르르 잠이 들 것 같은 건 집을 보던 아이가 아니라 지혜였다.
“엄마, 나 머리가 아프고 몸이 덜덜 떨려. 배도 조금 아픈 것 같아.”
준우의 목소리는 잠에 취한 지혜를 다시 현실로 데리고 왔다. 아이는 다시 잠들지 않았다. 알람이 울리기 한참 전이다. 더듬더듬 이마를 찾아 열을 느껴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지혜는 잠든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 경계에 있었다. 아이는 잠깐 지혜의 품 안에 파고드는가 싶더니 비실비실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모습이 조금 전 그녀와 닮았다. 물을 마시려나 했는데 몸이 움찔거린다. 위험한데. 손 쓸 틈도 없이 서 있는 채로 몸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하필 주방에서.
저녁에 먹었던 것들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았는지 한차례 뱉어내고, 급한 대로 가까운 싱크대로 달려가 나머지를 뱉어버렸다. 썩은 음식 쓰레기 봉지가 터진 것처럼 비릿한 냄새와 토사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놀란 마음보다 저걸 또 언제 치우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터졌다. 준우도 엄마의 눈치가 보였는지 ‘미안해’라는 말을 건네려 한 것 같지만, 고작 세 음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2차 폭격이 터졌다. 훌쩍 키가 자란 건 대견하지만, 그 높이에서 바닥에 뱉어내는 것들을 보니 어디까지 튀었는지 커져 버린 키가 원망스러웠다.
미안한 마음과 괴로운 몸 상태에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아이는 화장실에 가서 입에 묻은 것들을 대충 닦아내고 침대에 누웠다. 창백한 눈동자가 열린 문틈 사이로 지혜를 지켜봤다. 미안하다는 목소리가 이번에는 제대로 들렸다. 침대 위에서 토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대답하며 분홍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키친타월과 물티슈를 잔뜩 뽑아 바닥과 싱크대를 닦았다. 초점 없는 눈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끔뻑끔뻑 잠이 들었다. 소리 죽여 쓰다듬은 이마에서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아 안심이다. 잠든 아이의 입술은 비가 오지 않는 사막의 갈라진 모랫바닥 같았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