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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Jan 01. 2025

뒤끝 없는 사람

새벽 배송으로 물건을 받았다. 잠들기 전에 주문했는데, 눈을 뜨기 전에 도착하는 세상이다.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먹고 싶은 젤리가 한 박스 도착해 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아이들은 신나 꺄르르 소리를 질렀다. 고마운 새벽 배송 기사님들. 

하지만, 어쩌면 말이지. 순간의 희열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더 참을성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서늘한 생각이 스쳤다. 부족함을 참지 못하고, 기다림을 견딜 수 없게 되는 것 같았다. 


택배 비닐 포장지를 벗겼다. 설렘이 극대화되는 순간. 하지만 그것이 실망이 되는 찰나의 순간. 배송 기사님의 바쁜 일정 때문이었을까, 혹은 애초에 불량이었을까. 젤리를 가득 채운 플라스틱 통은 보기 좋게 박살 나있었다. 마치 어린아이의 돌팔매질에 와장창 깨져버린 유리창처럼 뾰족한 이를 드러낸 채였다.

'아, 이게 뭐야.'

조금은 화가 났던 것도 같다. 동시에 유리가 아니었음이 다행이라 여겼다. 반품을 해야 할까 어쩔까 고민하다 그냥 개봉하기로 했다. 어차피 내용물은 소포장이 되어있어 문제가 없었으니까. 뾰족하게 드러낸 이를 잡아 뜯어 공간을 더 벌렸다. 날카로운 것에 베이지 않게, 작은 조각이 섞여 나오지 않게 천천히 내용물을 꺼내 옮겨 담으니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다행이다.


보통 이런 식이다. 약간의 스크래치 정도는 눈을 감아 버린다. 어차피 쓰다 보면 생길 테니까. 칼제비를 주문했는데 칼국수가 나와도, 주문한 음식이 기억 속의 맛과 달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i이기 때문에 말을 못 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웬만한 불의는 봐도 못 본 척 피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잠시만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막으면 괜찮아진다 여겼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푸드트럭 음식의 맛이 형편없던 날도, 자주 가던 국숫집의 육수 맛이 다르게 느껴졌던 날도 반드시 한마디를 건넸다. 사장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만 있어도 상관없었다. 사장님에게 전해달라며 불만사항을 차곡차곡 전했다. 그것이 고객의 권리라고 했다. 업주 입장에서도 이런 건 알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야 발전이 있는 거라고. 그래,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다. 



싫은 소리를 잘 하는 편이 못된다. 불만이 있어도 상자에 넣어 꾸역꾸역 봉인해 둔다. 틈으로 빠져나오려는 한마디까지 잡아 깊은 호수에 빠뜨리고 나서도 허우적대는 그것이 만들어낸 물살에 함께 휩쓸려 버둥거리곤 한다. 

'그때 한마디 해줄걸.'

의미 없는 후회를 곱씹으며 자신을 탓하곤 했다. 불편한 상황이 싫어 애써 덮어두려 한 것에 자괴감마저 든다.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면 배려, 아니 어쩌면 비겁함, 착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심. 그런 것들이겠지.

그런 마음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견디기 힘들어질 때가 온다. 꾹꾹 눌러 담은 여행 가방에 지퍼가 잠기지 않는 것처럼, 한가득 물건이 들어있는 비닐봉지가 뚝 끊어지는 것처럼. 누군가의 배려를 당연시 여기고, 착한척하는 사람을 기만하는 일들이 생기다 보면, 덮어둔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본래의 것보다 더 커져 있는 채로. 

그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에 와서 하는 것은, 어쩌면 당시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껏 괜찮은 척 버텼던 마음까지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뒤끝 있네."

한마디로 말문을 막아 버리곤 한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참았던 배려를, 직원의 실수를 덮어주려고 했던 아량을, 애써 만들어 준 것들을 건네준 설레는 마음에 대한 존중을. 그 한마디로 덮어버린다. 모든 것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여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지금처럼 입 닫고 살라고 짓밟아 버렸다.


하지만, 알았으면 한다. 솔직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당신의 무례함은 오롯이 받는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잔인함이라는 것을. 당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런 i가 입을 열었을 때는 그때는 정말 화가 난 것이라는 것을.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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