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동그라미들이 보인다. 물론 모두가 까만빛은 아니다. 그중에는 노란색도, 갈색도, 초록색도 있다. 빨간색도, 흰색도,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색도 있다. 차마 셀 수 없는 숫자의 동그라미를 누가 세어준 건지 갑자기 동그라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손뼉을 친다. 그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오늘 경기 전석 매진. 팬 여러분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동그라미들이 얽혀있는 그곳은 야구장이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힘들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는 농담이었고, 나머지는 사실이다. 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정도가 딱 좋다. 테이블이 두 개로 나뉘었을 때, 혹시라도 그 중간 즈음에 앉기라도 하면 이쪽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저쪽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몸을 반으로 잘라버릴 수 없는 나란 i는 혼란스럽기만 하니까.
개인적으로 사람 많은 곳을 선호하지 않는다. 모두가 한마디씩만 해도 수백, 수천 개의 말이 오가는 공간은 마치 혼돈과 같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신이 혼미해지고 기운이 빠진다. 마치 그 말들이 나의 정신력을 먹고 성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영혼까지 탈탈 털려 돌아오곤 했다.
분명 좋은 점도 있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쉬지 않고 말해주는 다른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임이 끝난 후 돌아오는 말은 '너는 참 말이 없다.'였다. 말이 좀 없으면 안 되나? 그리고, 말이 없다기보다 당신의 말을 열심히 들었다고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그 점은 무척이나 아쉽다.
그런 내게 누군가 물었다.
"그렇게 사람 많은 곳은 힘들다면서, 야구장은 어떻게 가나요?"
어라? 그러네. 나 야구장은 다니는구나.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내가 야구를 좋아해서 가는 건 아니라는 거다. 단지 나의 동거인 1.2가 야구를 좋아했고, 가족 나들이 차원에서(라고 쓰고 술을 마시러 간다 라고 읽지만) 동행하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10명, 20명도 아닌 만 명이 넘는 인원이 한곳에 모이는 곳을 다니니까. 심지어 그렇게 시끄러운 곳을. 야구장뿐만이 아니다. 공연 보는 것도 좋아한다. 대학로 소극장부터 대형 콘서트, 야외 락 페스티발까지. 엄청난 인원이 몰리고 내일의 에너지까지 쏟아내고 와야 하는 그런 장소도 꽤나 좋아하고 종종 찾는 편이다.
이런 내가 사람 많은 곳을 안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조차 의문이 들었다.
툭 던진 말은 잔잔했던 머릿속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꼬맹이가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가 여러 개의 물수제비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생각과 의문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나란 i는 어떤 i일까.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을 하든, 춤을 추든, 소리를 지르든, 흥에 겨워 들고 있던 술을 전부 쏟아버리든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방방 뛰고 기묘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접신이라도 한 것처럼 몸을 흔들곤 했다. 그들에 비한다면 나의 것은 그저 수줍은 몸놀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었다. 말 한마디에 경청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휘두른 방망이를 보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면 그걸로 충분했다. 가사 따위 몰라도 괜찮다. 조금 틀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대충 발음을 뭉개며 흥얼거릴 뿐이다. 순간을 즐기면 그걸로 된다. 수많은 동그라미 중 까만 동그라미 하나로 존재하면 될 뿐이다.
그래서 편했나 보다. 나로서 존재만 하면 되는 거니까.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