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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영글 Nov 20. 2024

당신은 미간이 아름답군요.

어린아이들과 숨바꼭질할 때면, 아이의 작은 몸은 이미 성인이 된 나의 시야에 너무 쉽게 들어와 버린다. 커튼 밑으로 빼꼼히 나와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보이고, 봉긋 솟은 이불 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절대 못 찾겠지?'라는 목소리가 식탁 밑에서 속삭인다. 머리만 숨겨놓고 본인 눈에 내가 안 보이니 내 눈에도 자신이 안 보일 거라 생각하는가 보다.

같은 동네에서 7년째 살고 있다. 오가며 마주치는 얼굴이야 빤하다. 아이들 학교 근처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낯익은 얼굴인데, 인사를 할까 말까. 저 사람은 나를 알까?',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엄마였던 것 같은데, 날 기억하려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상대방도 마찬가지라던데, 먼저 아는 척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상대가 나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경우가 아니라면 재빠르게 시선을 돌려버린다. 머리만 숨긴 채 "다 숨었다!"라고 외치는 어린아이처럼, 시선만 돌리면 이 불편한 상황이 해결될 줄 알았나 보다.


"내 눈을 보고 다시 말해봐요."


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환경 때문에 거짓말을 하며 이별을 통보하는 여자주인공을 닦달했다. 자기 눈을 보고 솔직하게 말하라 한다. 사람들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말하곤 하기 때문이다. 눈을 보며 말하는 것이 예의이고, 거짓을 말할 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는 i는 사람의 눈을 보며 말하는 게 상당히 어렵다. 거짓말쟁이도 아닌데, 눈과 눈이 마주치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한 긴장감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간다. 서로의 눈동자를 통해 발가벗겨진 나의 모든 것이 상대에게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니 내가 남자주인공의 상대가 아님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가 상관없는 이야기까지 잔뜩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껏 살아오며 자기 눈을 보고 말하라고 닦달하는 이는 없었다. 어딜 보며 말하는 거냐고 비웃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이야기할 때 내게 쏠리는 눈동자들에 얼굴이 달아올라 그들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나의 불안정한 시선을 스스로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입을 떼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더 이상 도망칠 수만은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보며 말을 걸어봤다.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던 친구와 마주 앉아 말하는 연습을 해봤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어쩌다 눈동자가 마주치면 갑자기 염소라도 된 것처럼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마주 앉았던 몸은 어느새 다시 나란히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던 시선은 그 너머 배경을 훑고 있었다. 쉽지 않았다.


"어디서 들었는데, 눈을 마주치기 힘들면 얼굴에 한 부분을 콕 집어서 거기를 보고 말하래."


나의 고민을 들은 친구 하나가 조언을 해줬다. 그리고 사실 자신은 상대의 코를 보고 말한다고 했다. 사춘기 소녀들의 코에 얼마나 많은 블랙헤드가 존재하는지, 말할 때마다 짜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고 덧붙였다.

블랙헤드를 보며 말하는 친구를 상상하니 실소가 새어 나왔다. 동시에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래서 너랑 내가 친구인가 보다. 허공을 바라보던 우리는 서로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로 했고, 나는 코를 깨끗하게 씻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고개를 숙인 채 불안정한 시선을 주워 담지 않는다. 여전히 눈과 눈을 맞추지도 못한다. 대신 상대의 눈과 눈 사이를 바라본다. 시선이 미끄러지면 코를 볼 때도 있고, 미간에 주름이 얼마나 깊은지 생각하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실수로 눈이 마주치면 순간 얼음이 되어버릴 때도 있지만, 금세 풀려나 얼어버린 시선을 살포시 옆으로 옮겨주는 여유로움까지 생겼다.

이런 내가 이해 안 될 수도 있겠다. 어차피 이해를 바라고 쓴 이야기는 아니니까. 그저 누군가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 수많은 연습과 노력을 해도 다다를 수 없는 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달까. 그런 누군가를 향한 비웃음을 거두어주고, 따뜻하게 감싸주길 소망해 본다.

덕분에 당신들의 미간이 얼마나 예쁜지 알아보는 나 같은 사람도 생겼으니까.



땅만 보며 걷는 아이가 있다. 어쩌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친구 엄마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의 이름까지 부르며 인사를 하는 옆집 엄마와는 달리 오늘도 흐린 눈으로 아이의 등굣길을 함께한다.

젠장, 눈이 마주쳐 버렸다. 어떡하지?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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