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문드문 연락을 주고받는 무리가 있다. 누군가의 생일 알림이 뜬다거나 연말 혹은 새해 같은 이벤트가 있을 때나 인사말을 건네는 정도이다.
처음부터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핫딜도 공유하고, 소소한 고민거리나 재미있는 이슈도 나누었던 것 같다. 선생님 눈을 피해 수업 시간에 쪽지를 주고받던 그때의 우리처럼. 하지만, 아무리 온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물리적 거리는 무시할 수 없었다. 결혼과 육아라는 틀에 갇히게 되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보다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의 공기를 공유하는 아이 유치원 엄마들에게 더 집중하게 되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떠들던 우리는 각자의 패턴에 맞춰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이 최선인 사이가 되었다.
우리의 시간은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조금씩 틈이 벌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모임의 참석률이 가장 낮았기 때문일까, 우리의 환경이 달라져 그랬을까. 어쩌면 낯선 이들보다 조금 더 불편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비겁하게 알콜의 힘을 빌리곤 했다. 그나마 한 모금, 두 모금씩 넘어가며 목젖이 꿀렁이고 나면 입을 여는 데 조금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나름 취기가 오르고 말이 많아졌다고 내심 안도하던 순간 마주 앉아 있던 이가 입을 열었다.
"너도 말 좀 해."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얘 원래 말이 없잖아."
옆에 앉은 이가 말을 이었다. 순간 모든 이목이 쏠렸다. 내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순간일 뿐이다. 나를 향했던 관심은 '맞아, 쟤는 워낙 얌전했잖아.'라는 말과 함께 다른 대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묻혔다. 빠르게 변하는 주제의 물살에 떠밀려 존재감을 상실했다. 말없이 한 잔 더 들이켰다.
'내가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니들이 말이 너무 많은 거잖아.'
그렇게 또 틀 안에 갇혔다.
알다시피 나는 iii이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학교라는 우물 안에 있던 시절에서 벗어나 사회에 내던져진 지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에 곧잘 듣던 '숫기가 없다.'라든가 '얌전하다.'라는 말이 칭찬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말이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절실히 깨달았단 말이다.
지금의 내향형 인간은 당연하지만 과거에도 내향형이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했던 것 같다. 뾰족하지 않은 성격 덕에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숭숭 솟아있던 사춘기 소녀들 사이에서 꽤 많은 친구를 두루 사귈 수 있었지만, 선뜻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게 친구에게만 해당했을 리가 없다. 낯선 사람에게는 입 하나 벙긋하는 것마저 어려운 숙제와 같았다.
하지만, 사람의 관계가 늘 익숙한 것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다. 낯선 이에게, 그것도 어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연합고사라는 시험을 봐야 했다. 실업계 고등학교 지원이 끝난 후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봐야 했다. 연합고사에 좋지 않은 성적을 받으면 인문계 고등학교는커녕 인기가 많은 실업계 학교에는 지원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사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중요한 시험이라는 거다.
침착하게 OMR 카드에 검정으로 색을 칠하던 중 눈에 들어온 작은 점이 있었다. 뭐가 묻은 건지, 컴퓨터용 사인펜은 아닌 게 분명했다. 컴퓨터용 펜이 아니라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겠지만, 어두운색의 그것을 컴퓨터가 자칫 오해라도 할까 내심 불안해졌다. 컴퓨터의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됐으니까.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보니 약간의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이 분명 무언가 달라붙은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었다. 손톱을 세워 작게 달라붙은 그것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눌린 초콜릿처럼 생긴 그것은 생각보다 쉽게 '툭' 떨어져 나갔다. OMR카드 용지와 함께.
작은 구멍이 생겼다. 카드를 들어서 살펴보니 작은 점이 떨어져 간 자리에 생긴 구멍 사이로 바닥이 보였다. 시험지가 보였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험에, 망가진 OMR 카드라니. 나의 고등학교 진학은 어떻게 되는 건가, 겁이 덜컥 났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담당 교사에게 손을 들고, 용지 교체를 요청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iii였다. 누군가에겐 숨을 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겠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낯선 사람, 특히 처음 보는 어른에게 말을 거는 것, 무엇보다 엄숙하고 고요한 시험 시간에 다른 이들과 다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홀로 얼굴이 새빨개지고 긴장이 됐다. 하지만 해내야 한다. 스스로를 다독이고,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줬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떠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심호흡하고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허리를 바짝 세웠다. 동물의 왕국에서 봤던 것 같은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시험 감독 교사와 눈이 마주치길 바랐다. 야속한 교사는 시험을 보는 아이들을 보는 대신 창밖을 보고 있었을까,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쉽사리 나와 눈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초조했다. 째깍째깍 쉼 없이 움직이는 시계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고등학교 입학을 못 하는 거냐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허리를 다시 곧추세웠다.
식은땀이 흐르고 1초가 1시간 같던 순간이 모여 드디어 선생님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모두 고개 숙인 시험 시간에 한 녀석만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걸 그제야 발견한 눈치였다. 조용히 손을 들었다. 살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느긋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OMR카드에 난 구멍을 보여주며 답안지를 바꿔 달라고 말하는 손 역시 심장의 속도에 맞춰 떨고 있었다. 터덜터덜 제 자리에 다녀온 감독 교사의 손에 들려있던 답안지를 보자 안도의 숨이 쉬어졌다.
"해냈어."
이런 내가 바보 같은가? 혹은 한심하게 느껴지나?
나는 그래 보이던데.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 언스플래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