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어둠이 공기 중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수확 철이라 이른 새벽부터 일꾼들이 가득 차 소란했을 그곳은 마치 썰물이 훑고 지나간 것처럼 적당한 고요함만이 남아있다. 바스락바스락, 일꾼들이 떠나간 조용한 밭. 갈 곳 잃은 채 바닥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여인들만이 오직 고요함과 함께였다.
부지런한 일꾼을 남편으로 둔 탓에 더 부지런한 아침을 시작했을 여인들은 종일 분주하게 일하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구부정하게 굳어버렸을 그 몸을 다시 굽혀 떨어진 이삭들을 주워 모았다. 아직 수확되지 못한 그것들은 들쥐나 새가 쪼아 먹거나 어쩌면 썩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들의 치마폭에 담겨 집에 돌아가면 허기짐에 울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것이다. 분명 본인도 배가 고팠을 텐데, 잡을 것도 없는 비쩍 마른 뱃가죽을 움켜쥐고 사랑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연신 허리를 굽혀 바지런히 손을 움직인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그림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이다. 그녀들의 모습은 애달팠지만, 그래서 숭고하다.
‘혼자 있고 싶다.’
수영은 엄지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여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자음과 모음이 뒤섞인 여섯 개 음절짜리 짧은 글을 적고 스마트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불룩해진 주머니는 오늘도 무겁다. 글이 등록되었다는 알림 소리에는 지독한 고단함이 따라붙었다. 한참 숙이고 있던 뻐근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했다. 자칫 눈앞이 핑 돌 것 같은 뜨거운 여름날이다. 불룩해진 바지 주머니에 금세 땀이 맺혔다.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온통 축축한 느낌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매일 뉴스에서는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씨’라고 어제의 기사를 번복했다. 양치기 소년처럼 날마다 거짓말이다. 내일이 되면 오늘과 같은 말을 뱉을 거면서, 이런 것도 뉴스라고 매일 떠들어 댄다.
'차라리 핑 돌아 쓰러지기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돈을 내고 불가마에도 들어가는 그녀였지만 냉탕이나 식혜가 없는 이곳은 사우나도 찜질방도 될 수 없다. 도저히 돈 안 들이고 땀 빼는 거라 정신 승리를 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온몸에 태닝 오일을 바르고 모래사장 위에 누워 있었다면 이 햇빛이 반가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고작 서해 앞바다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여름 땡볕 아래 서 있는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얼굴을 덮어버린 모자도, 엄마가 쓰던 것과 닮은 모양의 양산도, 심지어 꽁꽁 얼린 생수마저도 한껏 달아오른 몸의 열기를 식혀주지 못했다. 무엇보다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고, 꼬르륵거리는 허기짐까지 참아야만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영과 비슷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땅을 헤집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그들 틈에서, 발이 푹푹 꺼지는 물컹한 느낌 위에 수연은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며 한 번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지루해져 내려앉는 눈꺼풀에 억지로 힘을 줘 오직 작품에만 집중해야 했다. 눈앞에 보이는 작품명은 <꽃게 잡는 아이들>이다.
수영의 아이들은 땅바닥에 있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아 바닥이 잘 보이는 걸까? 혹은 정신이 산만해 이것저것 살펴보느라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호기심이 많아 그런 건지, 혹은 단순히 그냥 걷는 게 심심해 그랬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유 따위 뭐가 됐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목적지까지 빨리 가고 싶을 뿐.
아이들은 길게 늘어선 개미 떼의 종착지를 찾기 전에는 집에 가지 않았고, 민들레 홀씨는 전부 불어 가녀린 줄기만 남긴 후에야 엄마를 불렀다. 눈이 내리는 날은 도무지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30분 동안 가게 되는 마법을 부리는, 조금은 이기적인 꼬맹이들의 모습은 밀밭 주인의 따가운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바쁘게 이삭을 줍는 여인들의 자세와 같았다. 그녀들처럼 허리를 숙인 채 바닥을 헤집고 있었다.
분명 못마땅한데, 생각과 달리 웃음이 새어 나온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거야. 조금은 한심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귀여운 쪽이 더 컸다. 사랑하긴 하나 보다. 끙 소리를 내며 꼬맹이들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가 좀 있어?”
수영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엄마다!’ 하며 좋아했다. 서로 자기 옆으로 오라고 틈을 벌려준다. 꾸역꾸역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더니 햇빛 아래 녹아내린 땀이 몸의 굴곡을 따라 흘렀다 무릎 뒤로 접히는 피부는 땀에 눌려 미끄러웠고 신발과 바지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진흙을 보니 차는 분명 엉망이 될 게 뻔했다. 차를 아끼는 남편의 비명이 벌써 들리는 것 같다.
‘너 혼자 파라솔 밑에서 쉬고 있는 벌이다, 인간아.’
조금은 통쾌했다. 차만큼이나 얼굴도 엉망이 되겠지. 선크림을 제대로 바르지 못한 얼굴은 기미가 올라오고 팔과 다리는 보기 흉하게 얼룩덜룩해지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벌써 이 짓만 십 년째인데, 앞으로 십 년 안에는 끝나겠지.
아이들의 작은 얼굴도 수영의 얼굴 못지않게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뜨거운 햇빛 탓에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지만, 씌워주는 모자는 답답하다며 계속 벗어버린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내 얼굴이냐 네 얼굴이지, 했더니 결국 빨갛게 익어버렸다. 내일 아니 오늘 밤만 돼도 껍질이 벗겨지고 엉망이 되겠구나 싶어 집에 가는 길에 오이나 감자를 사야겠다는 생각까지 다다랐다.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빨개진 목덜미보다 빠알간 작은 입이 움직였다.
“엄마, 사랑해.”
갑자기?
“나도 사랑해!”
큰 아이가 덧붙였다.
“내가 더 사랑하거든.”
“아냐, 내가 더더더 사랑해.”
“내가 더더더더더더더더더 완전 더더더더 사랑해!”
뜬금없이 시작된 사랑 고백은 어느새 둘만의 경쟁이 되었다. 꽃게 따위 잊었나 보다. 손이 닿기는커녕 눈으로 좇기에도 까마득히 떨어진 하늘과, 끝이 보이지 않는 갯벌 사이의 공간. 그 모든 곳을 온통 사랑한다는 말로 가득 채울 기세로 쉬지 않고 고백하는 아이들이었다.
흔히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거대하다고 한다. 차 밑에 깔린 아이를 가녀린 몸의 엄마가 번쩍 들어 올릴 만큼의 괴력을 만들어내는 게 모성애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식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게 부모의 사랑이다. 하지만 수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쩌면 부모에 대한 자식의 사랑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을 때가 많다.
아이들은 꽃게를 잡다가 사랑을 고백한다. 밥을 먹다 반찬이 맛있으면 사랑을 고백한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힘을 주다가도 문을 벌컥 열고 새빨개진 얼굴로 ‘엄마, 사랑해’를 외친다. 어떠한 개연성도 뚜렷한 맥락도 없이 망설이지 않고 사랑을 표현한다. 어쩌면 그녀의 부모님께 받은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크기였다.
아이들의 사랑은 어른들의 것과 다르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어떤 사람을 선택하는 게 내게 더 득이 되는지 따위의 계산을 하지 않았다. 누가 아픈 손가락이고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따위 생각할 필요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
‘이렇게 조건도 대가도 없는 무한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지난 삼십여 년의 시간을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 아이들에게 부모란 하늘이고 우주라고 하지만 어쩌면 우주보다 거대한 사랑이다. 감히 나 따위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고민이 될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