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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Lee May 31. 2024

이선희 언니처럼 잘 부르고 싶어!!!

빰빰빠라라 빠라라

내가 아는 이선희 언니는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타며 혜성처럼 등장한 노래 진짜 잘하는 가수였다. 곱슬한 커트머리에 네모난 금테 안경을 쓰고 파란 치마를 입고선 구성지게 'J에게'를 부르참가수였다. 엄마는 라디오에서 'J에게' 흘러나오면 눈을 지그시 감고 감정을 가득 실어 따라 부르시면서 '이 노래는 가사도 참 좋다'라고 하셨다. 나는 철딱서니가 없어서 느리고 잔잔한 분위기의 노래는 뭔가 답답하고 숨막혔다. 나도 엄마처럼 가사를 음미해보고 싶었지만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왜 사랑하고 못 잊는다는 건지 통 알 수 없었다. 그냥 속 터지기 그지없는 노래일 뿐이었다. 멜로디가 좋은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이선희 언니는 이름 석자 빼고는 내게 슬슬 잊혀 가는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선희 언니는 굉장히 비장한 음악을 들고 TV에 나타났다. 제목도 '아름다운 강산'이란다. 자연예찬 노래인지는 모르겠으나 언니 특유의 힘 있고 짱짱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언니에게 아주 안성맞춤의 곡이었다. 뭐야, 왜 이렇게 잘 불러. 뒷부분에는 갑자기 빰빰빠라라 빠라라 빠라라 빰빠 빠라라라라라라,라고 하며 주문 같은 말을 더욱더 힘주어 불렀다. 그 모습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똑같이 따라 부르고 싶었고 나도 선희 언니 같은 목소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뭐? 연습이다.


밤이고 낮이고 난 결심한 그날부터 선희언니로 빙의해 살았다. 벽을 보고 정확하지도 않은 가사를 읊으며 노래를 반복 또 반복했다. 안 올라가는 부분은 꽥꽥 돼지 멱을 따며 질러댔고 계속 지르니 어느 순간 힘겨운 고비를 넘기고 소리가 올라갔다. 어느 날은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놀러 오셨는데 나는 인사만 까딱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또 노래 연습에 매진했다. 한참 열과 성을 다해 목을 쥐어짜고 있는데 방문이 쓰윽 열리더니 놀란 눈의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벨라야, 너 지금 뭐 하냐?"

나는 뭘 잘못하다 들킨 양 화들짝 놀랐고 이후에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할머니... 저기 그게..."

"어???"

"아뇨 그냥 뭐 좀 부르고 있었는데 히히..."

"응 그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빰빠라라라 거리던 애가 당황한 얼굴로 우물쭈물거리고 있으니 할머니는 뭔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셨는지 조용히 방을 나가셨다. 노래를 하는 건 좋은데 10살짜리 어린아이가 한 곡만 주야장천 반복해서 부르고 있으니 이상하실 만도 하지. 당시에는 아이돌이란 개념을뿐더러 어린아이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주어 노래부르고 또 불러대니 할머니에겐 의아한 상황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곡을 완벽히 끝내기 위한 일념으로 부끄러움도 잠시, 또다시 목이 터져라 '아름다운 강산'외쳤다.


선희 언니는 잔인했다. 이 곡을 완벽히 마스터했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에 한껏 취해있던 이듬해 '한바탕 웃음으로'라는 곡을 내놨다. 이 곡은 조금 더 밝고 유한 느낌이었지만 역시나 선희 언니의 쩌렁쩌렁한 가창력을 유감없이 발휘시켜 주었다. 또 오기가 발동했다. 멜로디가 딱 내 스타일인 데다 언니의 곡을 독학으로 한 번 끝내 본 경험자 아니겠는가. 다시 연습이다. 어릴 적엔 길거리 수레에서 그 당시 히트곡을 카세트테이프에 불법으로 녹음을 해서 팔았었다. 엄마는 그걸 종종 구입해 오셨고 나는 그걸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재생해 선희 언니가 불러주는 정확한 가사와 음정의 도움으로 이전보다 연습시간을 많이 단축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면 부를수록 나는 숨이 차오르고 기운이 빠지는데 테이프 속 선희 언니는 계속 힘차다는 게 좀 흠이했다. 드디어 고된 연습 끝에 디테일한 부분까지 모두 완성이 되었다. 드디어 언니의 노래를 오차 없이 따라 부르게 되었고 뿌듯함에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아무도 내 실력을 알아봐 주지 않아도 좋았다. 원래 진정한 고수는 고독한 법이니까, 허허.


이후에 선희 언니 다시 승부욕을 갖게 하는 곡을 들고 나오지는 않았다. 내 성대의 미래를 고려했을 마음에 든 노래가 두 곡에 그친 것이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 모르겠다.  곡이 마음에 들 가수와 똑같이 부르고 싶은 욕망이 어릴 때부터 무척 다. 가수의 창법, 기교, 발음까지 똑같지 않으면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났는데 곰곰이 이유를 생각해 보니 음악을 너무도 사랑하기랬던 것 같다. 가수와 똑같이 불러 나도 그 노래의 주인이 되고 싶었고 벅차게 좋은 곡을 그냥 귀로 듣고 입으로 흥얼거리며 스르륵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곱씹고 곱씹어 완벽히 체화가 되어 내 것으로 만들어야 안심이 되고 만족이 다. 누군가는 운동, 미술, 요리 등 특기가 있듯 나는 예민한 귀와 음악적인 감각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동경하고 모방하며 자란다. 특히 연예인이나 유명인사들은 어린이들의 큰 롤모델이 된다. 나 또한 좋아하는 가수를 동경하며 그녀의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불렀고 이러한 모방과 동경은 의 자아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다. 아이들은 자신이 닮고 싶은 대상을 선택하고 그들의 행동과 가치관을 모방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노래를 부르며 끊임없이 연습하던 모습은 훗날 내가 가수라는 직업을 향해 나아가고자 할 때 큰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가수지망생 40년 차) 하지만 동시에 부모는 아이들이 비현실적인 동경에 사로잡혀 방황하지 않도록 적절한 지도를 해줄 필요도 있다. 아이의 재능과 적성을 계발하되, 건전한 자아정체성 형성을 위한 조언자 역할을 어른들이 올바로 해준다면 몸과 마음이 건강한 '리틀 이선희'들이 앞으로도 계속 배출되어 한국 가요계를 반짝반짝 빛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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