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지는 않지만 4살인가 5살인가 엄마가 외할머니댁에서 홀짝홀짝 맛있게 커피를 드시는 모습을 보며 나도 한 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해본 것 같다.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끼니의 마무리에는 꼭 커피를 한 잔씩드셨던 엄마. 그 모습을 매일 보아왔지만 딱히 내가 마시고 싶다는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맥심가루를 두어 번 티스푼으로 떠서 커피잔에 넣고 민트색 주전자에서 삐익 삐익 물이 끓는 소리가 나면 치이익 커피잔의 반을 뜨거운 물을 채우신 후의 집 안공기가이전과 달라지는건 참 신기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허연 김과 고소하면서도 부드러운데 뭐라 말로 딱히 형언할 수 없는 매력적인 향이 엄마 곁을 감돌 때면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또커피를 드시면서 나에게 이런저런 말씀을 하실 때면엄마 입 속에서 포옥포옥 새어 나오는 잔잔하고 다정한커피 향이 참 좋았다.맛은 모르더라도 눈, 코, 귀로 이미 커피에 대한 친근한 기억이 명확히 내게 심어져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댁에서 엄마의 호로록 소리에 커피맛에 대한 호기심이 극대화되어,맛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까지 와버린 거였다.
"엄마 나 커피 마시고 싶어."
"에이 안돼. 커피 마시면 머리 나빠져, 벨라야"
"진짜 머리 나빠져?"
"그럼. 엄마 같은 어른은 괜찮지만 벨라 같은 아가가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대."
"마시고 싶은데, 잉..."
"벨라가 더 크면 그때 마시자?"
"..."
커피가 어떤 경로를 통해 뇌의 어느 부분을 비활성화시키고 파괴시켜 어린아이들 머리를 나쁘게 만든다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어린 나에게 그 원리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실지언정 알아들을수도 없지만 일단 머리가 나빠진다니 무섭고 끔찍하지 않은가. 공부 잘하고 똑똑한 어른으로 잘 자라고 싶은데 커피 한 잔 잘못 마셨다가 돌머리가 된다면 큰일이잖나. 어쩔 수 없이 순진한 어린이는 반강제적으로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침이 꼴깍 넘어가는 걸 꾹 참고서.
몇 달 후 머리가 나빠지는 참사가 일어나더라도 도저히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욕망덩어리 어린이는 엄마에게 다시말씀드렸다. 커피를 너무나도 맛보고 싶다고.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어느 날 엄마는 드디어 한 모금을 마시게 해 주셨다. 뜨거우니 좀 식혔다 주신다며 내가 마실 만큼만 남기시고 나머지는 후루룩 드셨다. 결국 간절히 원하던미지의 세계가 입안으로 들어왔고 머릿속에서는 반짝, 별이 빛났다. 머리가 나빠지는 게 아니라 기분이 황홀해지면서 똘똘이스머프가 된 느낌이었다. 엄마께 '진짜로 커피를 마셨으니내머리가 나빠지는 거냐'라고 여쭤보자,많이 마시면 진짜 나빠지는데 오늘은 아주 조금 마셨으니 안 나빠진다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한 잔 다 마시면 딸이 바보 될까 봐 한 모금만 마시게 해서 머리 안 나빠지게 만드신 울 엄마는 진짜배려의 여왕이었다.
카페인을 더 많이 섭취한 어린이는 기억력, 인지 유연성, 어휘 이해 및 처리 속도를 포함한 일련의 인지 테스트에서 더 낮은 점수를 받았다는2020년의 연구결과를 인터넷 기사로 본 적이 있다. 정말로 어린아이에게 카페인이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엄마의 말씀이 일리가 있었음에, 그리고 날 위하는 엄마의 마음에 감사한 생각이 진심으로 들었다. 커피 먹이는 게 어려운가, 핑계를 대고 못 마시게 하는 일이 더 어려운 것임을 나도 어미가 되니 잘 알겠다.공교롭게도 얼마 전부터 딸도 나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자주 묻기 시작했는데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 큭, 하고 웃음이 났다. 카페인이 어린이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눈앞에 들이밀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
커피의 매력은 이다지도 마력이 강한데 어린 시절 그렇게도 애타게 마시고 싶어 하던 커피는 정작 어른이 되어 위가 약한 관계로 디카페인만 마실 수 있다는 게 웃프기도 하다. 본 가격에서 500원이나 더 주고 마셔야 하는 커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못 마시는 것보단 나으니 진짜 커피 향이 그리울 땐 이렇게라도 마신다. 커피는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녀석이라 참 좋겠다. 이렇게 유명세를 오랫동안 떨치고 있다니. 앞으로도 그 멋들어진 향과 맛과 분위기를 잃지 말고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사랑둥이로 오래오래 남길 바라본다.
유년기 시절의 달콤 쌉싸름했던 기억들을 '행복했다'라는 네 글자로 표현할 수 있어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동시에 [칙칙폭폭 어린 날의 추억기차] 브런치북도 10회로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그동안 벨라의 추억여행에 기꺼이 동참해 주시고 어여쁜 댓글로 소통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