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핑크색을 좋아했던 나는 SNS아이디에도 pink를 넣을 만큼(브런치 주소도 pink가 들어간다) 이 색의 광팬이다. 핑크색이 왜 좋냐고 묻는다면 '그냥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요'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된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사람이 있듯, 핑크색은 나에게 엔도르핀을 돌게 하는 기분 좋은 힐링의 색 그 자체다. 핑크색을 공주병 환자라고 놀리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야 워낙 개성시대라 핑크를 좋아하던 민트를 좋아하던 각자 마음이기에 남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남들과 유독 다르게 소위 말하는 '튀게' 하고 다니는 사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나 공주병이라는 단어는 유독 핑크색과 궁합이 잘 맞아 공주병=핑크색이라는 공식도 있었다. 공주 하면 궁전에 살고 그런 공주들은 주로 핑크색 같은 러블리한 드레스들을 입고 핑크색 분을 바르고 핑크색 벽지의 방에 핑크색 침대에 핑크색 구두를 신고 다닐 것 같은 분위기라서 그런 걸까. 그저 취향적인 문제일 뿐인데 공주병과 연결시켜 버리니 핑크색이 괜히 밉살스러운 느낌을 대중에게 주는 건 아닌가 핑크 예찬론자로서 속상할 때도 있었다.
정확히 대학생이 되고부터 핑크색에 매료됐다. 핑크색 구두, 핑크색 머리띠, 핑크색 수첩, 핑크색 원피스, 핑크색 귀걸이 등등 핑크색만 보면 사족을 못 썼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특별한 계기도 없이 핑크색만 보면 갖고 싶고 모으고 싶고 입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핑크색으로 된 거라면 눈이 뒤집혔다. 사랑스럽고도 눈에 띄는 이 색을 만든 분은 누구일까, 어쩜 이렇게 나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을 수 있는 건지 이 핑크의 오묘한 매력에 빠져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핑크색을 착용하고 다니는 길거리 사람들이나 연예인들이 나오면 그 아이템을 째려봤고 갖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핑크는 내 색깔인데 저 사람들도 내가 좋아하는 색을 좋아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함과 호기심을 넘어 집착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다 내 방을 핑크색으로 도배해 달라고 할 판이었다.
그렇게 핑크색을 사랑하던 대학생은 아줌마가 되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핑크에 대한 집착을 부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져, 마음은 한결으나 핑크를 구하러 다닐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간혹 색을 골라야 할 기회가 오면 '당연히 핑크'를 잊지 않았다. 재작년 동네 친구들과 백화점 쇼핑을 하려고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는 거다.
"어머 너 패리스힐튼이니?"
"어? 왜?"
"위아래 핑크색 차림 웬일이니!!!"
"아..... 푸하하하"
진한 핑크색 일자바지에 연핑크의 도톰한 니트를 입고 서 있던 나는 내 차림새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친구의 말에 웃고 말았다. 별생각 없이 입고 나간 건데 위아래를 핑크색으로 입은 나를 보고 기가 막혔나 보다. 패리스힐튼을 언급할 정도라니.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힐튼 언니(멋있으면 '언니')의 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패리스 언니가 부자고 멋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핑크색을 즐겨 입는다는 건 잘 몰랐는데 진짜 핑크색 마니아였다. 예전에 소녀시대의 멤버 티파니가 핑크색 덕후라는 걸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패리스언니는 이보다 더했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핑크로 치렁치렁 치장을 한 언니는 전혀 촌스럽지 않았고, 러블리하다고만 생각했던 핑크를 우아하고 세련되고 힙한 느낌으로만들었다. 부유한 삶을 사는 언니라 그런가 핑크의 소화력도 고져스했다. 트레이닝복은 트레이닝복대로 원피스는 원피스대로 파티룩은 파티룩대로, 핑크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딱 패리스 언니같이 생겼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과찬을 나에게도 해주다니. 친구는 백화점 액세서리 매장에 가서도 점원 언니에게 자기 친구가 패리스힐튼이라며 저 핑크색 복장 친구에게 너무 잘 어울리고 멋지지 않냐고 했던 말이 계속뇌리에 맴돌았다. 그 당시에는 그냥 웃고 말았는데 패리스 언니 사진을 보고 나니영광스러운일이었던 거네.
핑크색을 좋아한 지도 어언 25년이 다 되어 간다. 나는 대학생에서 회사원에서 엄마로 변해 갔지만 마음속 수줍은 소녀는 핑크색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변함없는 사랑 진행 중이다. 나의 신분은 바뀌어 갔어도 핑크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라는 건 어찌 보면 내 안의 순수함과 러블리함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기쁜 일, 슬픈 일, 아픈 많은 일들이 나를 관통해 지나갔지만 색이 바래거나 녹슬지 않고 내 안에서 여전히 핑크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새삼 감사하다. 애써 지켜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간직할 수 있도록 큰 좌절과 고통과 포기해야만 하는 괴로움들이 날 괴롭히지 않았기에 나름 안락하게 핑크색의사랑스러운 마음을 유지한게 아닐까.
지금도 옷을 고를 때, 가방을 고를 때, 문구류를 고를 때 가급적이면 핑크색을 고른다. 이제는 핑크색이 선택의 기호적인 문제를 넘어서 나의 정체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핑크색을 고름으로 인해 나라는 존재가 증명되고 그 증명이 내가 또 살아갈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노란색과 민트색을 좋아하는 딸은 엄마는 핑크색이 왜 그리 좋냐고 가끔 내게 묻는다. 자긴 핑크색은 여려 보여서 별로라고. 그러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