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환하게 웃으시며 식탁에서 저녁을 먹는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으로 나를 궁금한 듯 쳐다보시는, 10년 전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였다.
내가 대학생이 된 이후 외가댁이랑 합가 하여 함께 살았다. 직장을 다닐 때에도 결혼을 해서도 할아버지는 늘 나와 함께였다. 대학생 때는 워낙 학교생활하랴, 연애하랴,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바빠서 할아버지와 자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주말 저녁에 시간이 맞으면 같이 식사하는 정도였을까. 그러다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 할아버지와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할아버지가 내 회사 생활을 무척 궁금해하셨기 때문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피곤에 전 모습으로 겨우 씻고 나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주방에 가면 엄마는 항상 새 밥을 지어주셨다. 그것도 밥솥이 아니고 돌솥밥을 해주셨다. 나만을 위한 1인용 돌솥밥이었다. 뚜껑을 열면 솥 안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공중으로 올라가고 갓 지은 밥의 고소한 냄새가 코와 식욕을 마구 자극했다. 하얗고 윤이 나는 찰진 새 밥을 숟가락으로 한 입 뜰 때면 매일 먹는 솥밥인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대접받는 느낌, 사랑받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를 엄마의 밥으로도 느낄 수 있었던, 돌아보니 참 엄마는 힘드셨을, 그러나 나에게는 잊지 못할 감사하고도 행복한 기억이다.
그렇게 고픈 배를 채우느라 허겁지겁 젓가락과 숟가락을 정신없이 번갈아가며 반찬공격을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쓰윽 할아버지가 만면에 환한 웃음을 장착하시고 내 앞 의자에 앉으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같은 멘트를 하셨다.
"벨라야, 오늘은 회사에서 재미있는 일 없었니?"
사실 회사에서 재미있을 게 뭐가 있겠나. 주어진 일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 그때 동료들과 조금 수다 떨면서 식사하고 다시 오후 근무 정신없이 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할 시간 6시가 아니던가. 그나마 외국계 회사라 야근이 없어서 칼퇴근의 장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저질체력의 이벨라에게는 출퇴근 자체가 고역이라 집에 들어오면 후딱 저녁을 먹고 씻은 후 침대에 벌러덩 눕고 싶었다. 그런데 이 소중한 저녁밥을 먹는 시간에 할아버지께 오늘 있었던 회사의 에피소드를 멍해진 머리를 회전시키며 구석구석 데이터를 다시 돌려보려면 귀찮을 때도 많았다. 컨디션이 좀 괜찮은 날에는 나도 재미있게 말씀드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입도 뻥긋하기 싫은데 할아버지가 저렇게 내게 기대를 하고 계시니 저버릴 수도 없어 짤수기처럼 기억을 쥐어 짜내 이야기를 펼쳐놓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가 내 앞에 앉으시려고 하면, 할머니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아이고, 거 애 배고파서 밥 먹고 있는데 자꾸 그 앞에 앉아서 말 걸지 좀 마요."
"아버지, 벨라 밥 먹잖아요. 나중에 물어보세요."
라는 타박을 하시기 시작했다. 뭐 그런 거에 굴할 할아버지가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안 쓰시고 계속 내 이야기보따리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기다리셨다. 그러다 계속되는 두 분의 눈치에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내 앞에 앉지 않으셨고 일찍 잠에 드셨다.
그땐 더 이상 할아버지가 회사 일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으셔서 해방감도 있고 몸이 편해져 할머니, 엄마한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이렇게 내 꿈에 찾아와 또 내 이야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니 슬프기도 하고, 하루 종일 내가 퇴근할 때까지 오매불망 기다리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벨라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참 재미있게 잘해. 사람을 확 빠지게 만드는 큰 재주가 있어"
할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난 내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할아버지는 나의 장점을 찾아 칭찬을 해주셔서 지금도 참 감사하다.
내가 첫 손녀, 첫 정이라서 할아버지가 날 너무 예뻐하셨다는 이야기를 엄마께 종종 들으면 할아버지가 더 좋고 가깝게 느껴졌었다. 난 할아버지가 어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젊은 할아버지 앞에 웃고 있는 아기 벨라가 있다. 우리 할아버지도 저렇게 젊고 댄디한 시절이 있었지, 날 바라보는 할아버지 눈빛이 정말 따뜻했구나, 할아버지가 다른 조카들은 모르게 나에게만 살짝살짝 잘해주신 것들이 참 많았는데 그 은혜들을 난 다 갚고 살았나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평생 온전히 받기만 한 것 같아 후회가 막심하다. 돈 한 푼 안 드는 재밌는 이야기라도 더 해드리며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렸으면 좋았을 걸 나는 그마저도 제대로 못 해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할아버지 잊은 건 아니냐고, 기억해 달라고 내 꿈에 갑자기 나타나신 걸까?
지난주에 잠시 친정에 들렀다 엄마가 며칠 후 할아버지 기일이라고 하시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그 며칠 전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고 했더니 엄마도 신기해하셨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 누군가의 기일 즈음이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예지력까지 생기는 건가 싶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타나신 건가, 싶으니 그렇지 않아도 할아버지 뵈러 호국원에 안 간지 너무 오래됐는데 찾아오라는 메시지인가도 싶었다. 조만간 정말 시간을 내 찾아가서 그동안 못 해 드린 이야기 주머니 한껏 풀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보고 싶은 우리 할아버지, 날 정말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아직까지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할아버지 생각 매일은 못하지만 어느 때에는 할아버지가 절 도와주고 계신다고 생각한 적도 많답니다. 여전히 절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그 은혜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사랑해요, 우리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