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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에 담긴 마음

by 이음 Mar 19. 2025

오랜 친구가 물었다. 

“니, 요새 왜 먹고 싶은 게 없노?” 

그때 알았다. 밥은 단지 배를 채우는 게 아니란 걸. 엄마가 떠난 그날부터, 내겐 반쪽짜리 식욕만 남았다. 배는 고팠지만, 입맛이란 게 사라졌다.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식사는 그저 꼬르륵 소리를 잠재우려, 억지로 밀어 넣는 한 끼에 불과할 뿐. 엄마 밥. ‘이젠 그 어떤 음식으로도, 내 허기를 온전히 채울 수는 없겠구나.’ 생각했다. 


“몸은 좀 괘안나? 반찬 좀 했는데, 지금 출발할라고.”

“아니다, 뭐하러... 성(언니)도 일하고 피곤할 텐데, 일부러 오지 마라.”

“다온이 챙긴다고 밥이나 제대로 묵었겠나? 지금 간다. 문이나 열어라.”

딸아이가 독감에 걸려 낫자마자, 역시나 이번엔 내가 몸살이 났다. 차라리 독감이면 며칠 누워 쉬기라도 할 텐데, 어중간하게 몸살이라니... 아픈 몸뚱이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출근해서 하루치 업무를 끝냈다. 딸아이 저녁밥을 차려주고 난 뒤에야, 맥없는 팔다리를 침대에 뉘었다. 살 같을 파고드는 이불이 지친 몸을 간신히 감싸주었다. 뜨겁게 올라오는 설움을 꾹꾹 누르고 있던 차였다. 


그녀는 내가 “성”이라고 부르는 언니다. 거제 토박이들이 친한 언니에게, “성”이라 부른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그녀를 꼭 “성”이라 불렀다. 그녀에게 느끼는 끈끈함과 고마움을 그렇게라도 에둘러, 표현하고 싶었다. 그녀는 늘 간식거리 같은 자잘한 것부터, 샴푸나 화장품 같은 생활용품까지, 이것저것 챙겨주고 싶어 했다. 반찬이며 과일이며, 어느 날은 김치통까지 들고 왔다. 친정 아빠 다음으로 내 먹거리를 걱정하는 사람. 친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온 그녀. 양손에 들린 장바구니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빵빵하다. 두 손으로 조심스레 식탁 위에 올린 장바구니. 그 무게에 놀란 듯, 식탁이 살짝 내려앉으며 툭! 소리를 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손목을 털어내는 그녀의 동작이 사뭇 진지하다. 싱크대에서 후다닥 손을 씻고는, 드디어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멸치볶음, 진미채 볶음, 양파장아찌, 묵은지... 작은 그릇들이 줄지어 식탁 위에 자리를 잡는다. 

“우와! 김밥이다!” 

며칠 새, 들었던 가장 높은 데시벨 소리. 그녀가 만든 김밥, 딸아이는 그 맛을 안다.

“김밥은 다온이 묵고~ 요거는 엄마 묵고.”

걸쭉한 노란 소스가 담긴 그릇이 놓였다.

“... 이걸 언제 다 했노?”


호박죽. 오랜 시간 천천히 끓인 마음 때문이었을까. 유독 기다려지던 엄마 손맛이다. 커다란 솥 앞에 서 있는 엄마. 이마 위로,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방울져 흐른다. 목에 두른 수건 끝으로 연신 땀을 닦아낸다. 그녀의 옷에 밴 땀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축 처진다. ‘괜히 먹고 싶다고 해서...’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쉼 없이 죽을 휘젓는다. 두 손으로 꽉 움켜쥔 긴 주걱이, 고집스럽게 솥 안을 돈다. 자식 입에 넣어줄 생각에, 두 팔은 춤을 춘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걸쭉한 황금 물이 부드럽게 일렁인다. 피어오르는 김이 그녀 얼굴을 감싸며 안개처럼 흩어졌다. 온 집안엔 달큼한 냄새가 퍼지고, 노랗게 익어가는 죽 속엔 그녀의 미소가 번진다. 


“오늘 밥은 묵었나? 얼른 한 숟갈 해라. 먹는 거만 보고 갈끼다.”

“그래도 숨 좀 돌리고 가라. 민트 티, 괜찮제?” 

김밥, 호박죽, 민트 티. 어딘가 엉뚱하고 엉성한 식탁 위에서, 세 여자는 세상 제일 풍족한 한 끼를 나눴다.


혀 위에 앉은 호박죽이 입안 구석구석을 채운다. 양 볼의 둘레를 따라, 입천장과 잇몸 사이사이까지. 벨벳 같은 호박 결 사이로 작은 쌀 알갱이들이 굴러다닌다. 내려가는 목구멍 주위가 뜨끈 해지면서, 굳어 있던 설움도 녹았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 마음을. 아무것도 삼키지 못할 것 같았는데, 물 흐르듯 술술 넘어갔다. 오랜만에 만난 속까지 채워주는 밥이었다. 


그녀의 호박죽을 넘기며, 나도 누군가에게 호박죽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힘든 날, 적당한 거리에서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하기보단, 그 불안 속을 함께 걷는 사람. 천 마디 위로 대신, 같이 울어주는 그런 사람. 


밥은 그런 것이었다. 오래된 기억을 조용히 불러내는, 말로는 쉽게 전달되지 않는 마음을 전하는,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무심한 듯 서로를 보듬는... 밥심으로 산다는 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다. 어쩌면 서로에게 기대어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밥 없이 살 수 없게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딸아이와 단둘이 있는 게 안쓰러워서일까, 유난히 이곳엔 밥에 얽힌 추억이 많다. 못 먹고 사는 것도 아닌데, 친한 지인들은 늘 내 끼니를 챙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가며 반찬을 챙겨온다. 독감이나 코로나에 걸리기라도 하면, 현관 앞엔 죽과 반찬이 쌓인다. 생일이면 미역국을 끓여 오거나, 배달 음식이 도착한다. 어릴 적, 엄마가 먹을 복이 많다고 했는데, 그 복이 여기서 터지나 보다.


밥. 애를 쓰기보다는, 그저 잊지 않는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는 돌봄. 그 밥 덕분에 이곳이 남의 땅 같지만은 않다.      


“이거 오늘 저녁에 다온이 하고 묵으라고, 쪼매 챙겨왔다. 얼마 안 된다.”

나이 지긋한 수학 선생님께서 호박죽을 챙겨주셨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여기선 이래저래 자꾸 엄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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