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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 Apr 03. 2024

당신의 전생을 알려드립니다.

남자 셋과 꽃놀이를 간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군대를 지원한 것과 같다. 한마디로, 못할 짓이라는 거다. 차라리 동네 산책이 낫지 힘들게 예쁜 장소에 가서 차와 사람에 치여 짜증이 난 남자들 틈에서 인생사진을 건질리는 만무하고 그들과 사진을 찍느니 지나가는 어리고 잘생긴 청년에게 사진 좀 같이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이것이 남자 셋과 13년째 살면서 터득한 <형제맘이 포기해야 하는 것 100가지> 중 하나이다.


지난 주말은 벚꽃이 만발하는 벚꽃 주간이었다. 게다가 햇볕은 쨍쨍, 바람은 선선하니 날씨까지 모든게 완벽한 날이다. 이런 날 집에만 있을 수 없다.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꽃구경을 가자며 가족들을 꼬셨다. 주말이면 방바닥과 하나가 되어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널브러진 그들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지만, 그래도 결국 양치를 시키고 옷을 입혀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부여 정림사지 박물관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도 벚꽃 맛집이 많지만 굳이 부여로 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처음에 말한 자원입대를 하지 않기 위해 그들이 무언가 볼거리, 할 거리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거리는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안된다. 가까우면 귀소본능이 일어나 남편이 차에서 기다린다는 핑계로 '집에 가자'를 온 몸으로 표현할 것이고, 거리가 너무 멀면 차에서 핸드폰을 하겠다는 두 녀석이 난리를 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작용을 막을 수 있고 벚꽃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을 따져가며 장소를 찾아낸 나 자신이 참으로 기특하고도 짠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10대 둘, 40대 하나 ...아들 셋을 키웁니다

아침형 가족인 우리는 오늘도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을 했다. 직원보다 먼저 도착해서 주변을 살펴보는 재미는 해 본사람만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내 것일 것 같은 행복감과 경비원에게 걸릴 것 같은 긴장감, 그리고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까지! 아직은 찬 아침공기를 마시며 우선 정림사지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머! 너무 예쁘다~~~~~!"

주차장 뒤편 전체가 벚꽃이 활짝 펴서 바람에 벚꽃 잎이 날리는데, 눈이 내리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꽃잎은 흰색인데 왜 분홍빛이 어린것처럼 보이는지.. 파란 하늘과 너무 잘 어울린다. 아침이라 아직은 기분이 괜찮은 2호를 꼬셔 점프샷과 전신사진을 찍어본다. 1호가 사춘기가 끝날 때까지 2호는 사춘기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2호까지 저렇게 예쁜 벚나무 밑에서 검정옷을 입고 저승사자처럼 굳어있는 표정으로 서있는 이가 한 명 더 생기는 건 생각만 해도 민폐다.




"어? 오픈했다! 가자"

담당 직원이 이제서야 자물쇠 구멍에 키를 넣고있는데 그걸 또 캐치해서는 우다다닥 달려가기 시작한다. 남편은 어디에 있었는지 아이들 소리에 자연스럽게 입장을 한다. 저 사람이야 말로 진짜 저승사자일지도...

오랜 시간 기다렸던 박물관 견학은 역시나 30분 컷이었다. 모든 버튼을 눌러보고, "나 이거 알아" "이것도 봤어"를 인사처럼 스치듯 하며 지나가는 아들 녀석을 붙잡아 설명을 해보지만 역시나  입만 아프다.

그래. 그럼에도 뭔가 얻겠지. 이 많은 것들 중 하나는 기억에 남겠지. 박물관에서의 에티켓만이라도 지켜달라고 애원을 하고,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예쁜 연꽃이 그려진 기와를 보고 어떻게 그냥 아는 것이라며 지나칠 수가 있지? 이 화려한 옷과 장식은 또 어떤데?  남자 셋이 지나간 곳마다 놓여있는 작품 같은 유물들을 살피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전시관 밖에서 "아하하하하하" 큰 웃음소리가 들린다. 우리 애들이다!

이번에도 전시관 하나를 제대로 못 보고 나와야겠다. 아쉽지만, 지금은 저 소음을 끄러 가는 게 우선이다.

"조용히 해! 여기도 박물관 안이야."

"엄마, 이거 해봐. 엄청 웃겨."

"아빠는 아낙네래! 완전 딱이지."

회사에서 일이 있어 몇 달 쉬고 있는 남편은 돈 버는 마누라를 대신해 눈치껏 본인이 할 수 있는 집안일(설거지와 빨래 정도)을 하고 있었기에 아낙네가 딱이긴 하다.

"이게 뭔데, 아빠가 아낙네래?"

"이거? 전생을 알려주는 기계래."

"나는 왕 나왔다? 내가 제일 높은 거야."

"그래? 그럼 엄마도 해봐야겠는데?"

랜덤으로 나오는 걸 텐데 애들 앞이라서 인지 너무 떨린다. 아낙네보다 나쁜 게 뭐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면 적어도 한 달은 놀릴 것 같은데...

"엄마는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님이었던 거 아냐?

"엄마는 이 씨가 아니잖아."

"전생에는 이 씨였나 보지."

다행이다. 아이들이 역사 속 인물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멋있게 생각하는 '장군'이 나왔다. 남자/여자는 그들에게 중요치 않았다. 그저 멋있으면 장땡이다. 장군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진짜 전생에 군인이었나 생각이 잠시 들었는데, 그럼 진짜 남편은 전생에도 집안일을 하며 투덜거리고 있었을까나? 상상만 해도 너무 웃기다.

"1호는 왕이었고, 2호는 뭐 나왔어?"

"나는 좌평. 근데 그게 뭐야?"

"역사책에서 무과랑 문과 있는 거 알지? 문과에서 1품이 좌평이야. 2호랑 진짜 잘 어울린다. 너 책 읽고 토론하는 것도 잘하고, 문제해결도 잘하잖아."

"아~ 삼국지에서 나오는 제갈량 같은 거구나. 좋았어~!"

"그러고 보니 이거 진짜 잘 맞네. 웬만한 점쟁이보다 용한데?"

"우리 아빠 회사 가고 나면 다시 와보자. 그땐 아빠 뭐라고 나오는지."

이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멋진 탑과 화려한 유물이 아닌 전생 맞추는 기계가 남자 셋 뿐만 아니라 나까지 매료시켰다. 진짜 남편의 복직 후에 와서 다시 해 보면, 남편 직업과 관련된 전생이 나올까?


아, 맞다!!
나 세례 받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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