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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누군가로부터
유산을 받는다

그리고 유산은 내가 싫어했던 사람의 모습으로부터 온다

by 엔조

불편한 상사와의 근무연장, 전역이 한 달 밀린 것 같다.


매주 매주 새로운 고난이 찾아온다.


지금 상사는 5월 이후면 안 볼 사람이었는데, 진급이 늦어지며 6월에도 함께 일하게 됐다. 지옥 같은 한 달이 연장된 셈이다. 상사의 진급이 미뤄진 이유는 현재 상사의 인수인계가 늦어지고 있어, 본사에서는 내가 이 매장을 맡기엔 아직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본사 입장에서 중요한 매장을 경력 없는 직원에게 맡기는 건 큰 리스크일 수 있다. 나 역시 본사의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이전에는 70-80% 정도 배우고 나머지는 하면서 익혀가자라는 스탠스를 본사가 가지고 있었지만, 내가 맡게 될 매장이 워낙 중요한 매장이다 보니 현재 상사의 90-100%의 퍼포먼스를 그대로 이어받고 일을 했으면 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5월 초에 받은 인수인계 이후 별다른 인수인계는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본사를 통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결정이 내려지자 당황스럽고 골치 아픈 상황이 됐다.


지금 상사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전형이다. 매장에 출근하면 전일자 근무자의 실수나 흠을 찾는 게 일과처럼 보이고,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데서 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화를 가득 품고 있는 듯한 태도와 꼬투리를 잡는 말투는 피로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주방이나 바에서 감정이 앞서면 말 그대로 헬스키친이 된다. 문제가 생겼다면 누구 탓을 하기보다, 침착하게 해결해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 가끔은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로 모든 걸 내던지고 퇴사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온다. 하지만 그 책임에서 벗어나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면, 또 다른 고충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 안의 화를 조용히 다스린다.


내가 매장을 맡게 된다면, 직원들끼리 스트레스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 서비스 직군은 손님으로부터, 혹은 자기 실수로 인한 스트레스로도 충분히 힘들다. 직원들끼리 서로에게서까지 스트레스가 생기면, 안 그래도 힘든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나는 그런 매장을 만들고 싶지 않다.


이번 주의 콘텐츠 : 승부, 더 베어


이번 주는 3일간의 징검다리 휴무 덕분에 콘텐츠를 즐길 시간이 많았다. 책보다는 영화와 드라마 위주로 시간을 보냈다. 넷플릭스 영화 '승부'와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 '더 베어'를 몰아봤다.


'승부'는 바둑이라는 소재보단 이병헌과 유아인의 연기 대결이 인상적이었다. 제자에게 패배한 후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이병헌의 감정선은 현실보다 더 영화 같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그 감정을 더욱 묵직하게 만들었다. 주제보다는 인물들의 연기차력소를 보는 재미가 컸던 영화다.


시즌 1: 텃세와 시스템, 그리고 성장의 시작


드라마 '더 베어'는 시즌 1부터 3까지 유튜브 어퍼컷 채널을 통해 정주행 했다.


시즌 1은 천재 셰프인 주인공이 자살한 형의 레스토랑을 물려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기존 멤버들의 텃세와 고집, 빚더미에 놓인 매장의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 셰프로서의 실력은 뛰어나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 미숙한 그는 동료들과의 갈등 속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형이 남긴 편지의 마지막 문장.

"I love you. Let it rip."
그냥 해버려.

주인공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형에게 듣고 싶던 말을 편지를 통해서 나마 응어리를 해소하는 모습에서 나 또한 깊은 감동을 느꼈다.


시즌 2: 성장과 자존심 사이


개인적으로 시즌 2를 가장 재미있게 봤다. 시즌2에서는 인물 개개인의 성장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팀원들의 장점을 알아보고 적절한 연수 기회를 제공하며 스스로 성장하게 돕는다. 인물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나 역시 같이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 재밌게 본 것 같다. 동시에 주인공 자신도 빚으로부터 한숨 돌리며 지금까지 스스로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진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동시에 연애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자존심과 불안감으로 인해 결국 스스로 멀어지게 만드는 장면에선 안타까움이 컸다.


시즌 3: 'Legacy'라는 이름의 유산


시즌 3은 조금 더 무겁다. 미슐랭 스타라는 목표에 집착하는 주인공, 그의 강박에 지쳐가는 팀원들, 끝없이 고조되는 갈등. 특히 그중에서도 'Legacy'라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처음엔 요리 스킬을 계승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 의미는 달랐다. 주인공은 과거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상사로부터 극심한 압박을 받았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었다. 다시 그 상사를 마주한 자리에서 주인공은 "당신 때문에 트라우마도 생기고 여러모로 고생했다"며 울분을 터뜨리지만, 상사는 오히려 "너는 처음에 그저 평범한 셰프에 불과했어, 그리고 내가 너를 훌륭한 셰프로 만들었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해도 된다"라고 말한다.


맞다. 주인공은 그에게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일을 할 때 날카로우면서도 예민하고 남들에게 화를 내는 모습은 주인공이 싫어하던 그 상사의 모습 그 자체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싫어했던 상사의 모습을 본인의 모습에서 발견한다.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던,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


나도 생각하게 됐다. 내가 훗날 매장에서 화를 낼 때, 그 모습에서 내가 싫어하던 상사의 모습을 내비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사람에게 받았던 영향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자리 잡은 건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사람마다 각자의 지옥 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건넨 친절 하나가 그 터널 속에서 작은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나도,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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