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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현 Oct 22. 2023

흑곰을 만나다

(도전 D+37) 134km/ 누적 거리: 5539km

드디어 펜실베이니아를 넘어 뉴저지에 들어왔다.

이제 큰 산들은 모두 넘었지만, 아직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역시 마지막 관문인 뉴저지도 녹록지 않았다.

자욱한 물안개와 홈이 움푹 팬 비포장도로는 나를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500km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모든 게 즐거웠다.

이제 곧 도전을 마칠 생각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오늘도 사람 하나 없는 길을 혼자 달렸다.

수풀이 우거진 도로는 약간의 습도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외롭고 무서웠지만 도로 상태가 엉망이라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자갈과 홈을 피해 가면서 조심히 달렸다.


한참을 달리는데 바로 옆 풀숲에서 쿵 소리가 났다.

그 묵직한 소리는 이제까지 들었던 소리와는 달랐다.

토끼나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이 도망칠 때 풀을 가르는 소리가 나는데, 이번에는 소리가 훨씬 컸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나보다 큰 흑곰이 나무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곰을 본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 밖에는.


이제까지 곰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 시나리오를 많이 그려왔다.

곰을 조심하라는 미국 친구들의 조언에 유튜브 거리라면서 넉살을 떨기도 했다.

지만, 실제로 곰을 보니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잠깐 얼어붙어있던 중, 문득 오늘 아침에 읽었던 기사 하나가 떠올랐다.

주립공원 책자에 쓰여 있던 "곰을 만났을 때 대처법"이었다.


기사에서는 곰을 마주쳤을 때, 절대 뛰어서 도망가거나 나무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

사람이 많으면 다 같이 손을 들고 큰 소리를 내어 곰을 쫓아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곰이 사람을 발견하기 전에 자리를 피하는 거라고 했다.


다행히 아직 곰과 눈을 마주치기 전이었다. 숨을 죽이고 페달을 밟았다.

패닉이 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달렸다.


다행히 곰은 쫓아오지 않았다. 달리다 보니 Walpack Inn이라는 식당이 나왔고 도망치듯 들어갔다.

급하게 들어간 식당은 알고 보니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햄버거가 3만 원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잠깐 손이 떨렸지만, 나를 지켜줄 곳이 생겼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음식을 시켰다. 비록 밥값으로 8만 원이 나왔지만 행복한 식사였다.


그래도 아직 숙소까지는 한 시간 넘게 남았다.

마치 곰이 쫓아올 것 같아서 너무 두려웠지만, 곧 해가 질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한참을 숨죽이며 달리고 나서야 해가 질 때쯤 겨우 숙소에 들어갔다.

창백해진 나에게 주인 레이나와 렌디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사람도 다니지 않는 숲길을 혼자서 온 게 참 용감하다며 나의 패기에 감탄했다.

내가 걸어온 경로를 보고는 곰을 만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그들은 떨고 있는 나를 위해서 오두막 숙소를 저렴한 가격에 내주었다.

그리고 음식과 물, 그리고 빨래에 필요한 동전들도 무료로 건네주었다.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아직도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제까지 죽을 뻔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지만, 오늘은 정말 위험했다.


비상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은 게으른 내가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이겨낸 내가 기특하기도 했다.


이제 뉴욕까지 남은 거리는 단 150km!

언덕이 많아서 하루 만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내일 끝내봐야겠다.


드디어 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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