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암묵적이고, 기본적인 도리가 있다.
물론 꼭 지켜야 하는 거는 아니다. 준수하지 않아도 되지만 비판받을 여지가 있는 수준. 이 측면도 아마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예시로는 '담배를 피우러 나간다', 혹은 '밤에 집에 있다가 술 약속을 나간다'와 같은 상황도 이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바로, 남편들이 집안의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 버리는 것이다.
특히, 가정이 있는 러너라면 거의 '국룰'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직장이나 생업이 있으면 낮보다는 아침이나 밤에 달리러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할 수 있는 법! 바로 쓰레기를 들고나가는 거다. 일반 쓰레기, 재활용, 비닐 등 종목은 어떤 것도 무관하다. 하지만, 여기에 더해 음식물 쓰레기는 필수로 끼워줘야 한다. 다른 건 안 버려도 '음쓰'는 이 행동의 핵심이며, 거의 기본 '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게 당연하고 쉬운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솔직히 나름 번거로운 과정이다. 쓰레기장과 동선이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쓰레기통이나 봉투, 혹시 기계식이라면 카드 등을 챙겨야 하는 준비물도 짐이 된다. 무엇보다도 비위가 약하거나 손을 씻어야 하는 문제도 마음을 내야 할 수 있는 거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예전에 나는 '감히' 쓰레기를 들고나가지 않았다. 열심히 달려야 하는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질색이었기 때문이다.
러너들은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서 그만큼의 거리를 달린다.
약간은 약속, 규칙을 넘어 의식에 일종인 리추얼(ritual) 같은 느낌도 있다. 무슨무슨 '런'이라고 해서 의미를 부여하는데, 누구의 생일 축하런, 기념런, 3.1절런, 815런 같은 식이다. 그 외에도 개인 간의 이벤트나, 달리기 행사 등 다양한 차원으로서 이를 표현한다.
러너들의 숫자 사랑은 정말로 못 말린다. 예를 들어 5월 13일이 생일이라면 5.13km를 달리고 8월 15일 광복절에는 8.15km를 달리는 거다. 러닝 인플루언서 션은 8월 15일에 무려 81.5km를 달리고 이를 통해 모인 기금을 독립 유공자 분들에게 집을 지어 드리는 뜻깊은 달리기 행사를 한다. 정말 션은 러너들의 레전드다.
올해도 어김없이 신년에 러너들이 그렇게 20.25km를 달려댔다...
어쨌든 일반 러너들도 션 정도는 아니어도 '숫자런'을 꼭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도 우리 아내와 아들의 생일 축하런이나 결혼기념일 등을 기념해서 열심히 달려줬는데, 아주 질색을 하더라... 제발 그런 거 좀 하지 말라고...
'이런 의미 있는 걸 왜 싫어하지?'
그때 당시에는 아내가 그냥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걸 하는 나만 굉장히 뿌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숫자런'을 할 처지가 아니다...
작년 초부터 원인 모를 갑작스러운 다리의 통증은 러너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달리기나 운동은커녕 일상생활도 불편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15년 가까이 달리기와 마라톤에 주력하고, 애정을 쏟았던 결과는 정말 참담했다. 그리도 좋아했던 러닝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인해 나의 정신은 불안정했고, 그로 인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은 나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큰 피해가 되었다.
'도대체 나는 왜? 무엇을 잘못했길래 예전처럼 달리지 못하게 된 걸까?'
매 시간을 다시 돌아보고 고민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알 거 같다. 아내는 러너가 아니다. 러너들은 숫자 달리기가 굉장히 의미가 있고, 나름 보람 있는 의식으로 기념한다고 해도 이는 일반 사람이 봤을 때 전혀 공감이 안 되는 행동일 수 있다. 타인에게도 이해될 수 있고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해줘야 기뻐한다. 나는 션이 아니다(당연). 그 당시 나는 나만을 위한 자기만족의 달리기에 빠져있었다. 전형적인 보여주기식의 '쇼'였다...
열심히 달렸을 때는 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좋은 것이 남에게도 좋은 거라고 믿었다. 나 자신은 물론 주변이 행복하고, 모두가 바람직하다고 바라보는 '유익이 되는 달리기'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 정말이지 적당히 달리면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인생까지 달라진다.
아내는 지금 내가 달리기를 하러 나가는 걸 좋아하는 듯하다. 이전보다 '조금 더' 수준의 차이일지는 모르지만 달라졌음을 느낀다. 꼭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려고 하고, 예전처럼 나가서 1~2시간 이상씩 달리는 게 아니라 30분 만에 들어와서 가정을 신경 쓰고, 생업에 더 애쓰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자체는 소소할지 모르지만 최소한 우리 가족과 아내에게 유익을 주는 활동인 것은 확실하다!
솔직히 내가 아프지 않고 계속해서 달리기에 집중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처럼 당연한 듯이 쓰레기를 들고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내 기록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 예전에는 잘 달리고 싶은 나의 욕심이 오히려 가정의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꼭 열심히만 한다고 바람직한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적당히를 알게 된 지금에서야 조금 더 달리기에 대한 중요한 지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어쨌든, 내가 강요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러너들에게 이거 하나는 꼭 하라고 권유하고 싶다.
나와 가족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러닝!
달리기 하려면 당연히 쓰레기는 들고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