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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들 Dec 18. 2024

아들의 유튜브 알고리즘, 내가 너무 방심했나?

19금 알고리즘이 아이를 위협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야, 자기 일 안 할 거면 시키는 일이라도 하든지! 일을 안 할 거면 간섭을 말든지!, "

친구에게 회사 이야기로 40분째 핸드폰을 달구는 중인데 어찌 된 일인지 말을 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고 분노만 쌓인다. 감사하게도 새해에 일복을 너무 많이 받아서 연말이 되자 결국 터져버렸다. 매일 아침 "학교 잘 다녀와"라고 아이들에게 인사하지만 정작 회사에서는 결코 안녕하지 못했다. 달궈진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버려서 친구와의 긴 통화는 끝이 났고 그제야 문제집 풀고 있는 아들이 시선에 들어온다.

 "저녁 뭐 먹을까? 아니, 저녁 뭐 시켜 먹을까?"


 어쩌다 보니 동거인 넷 중 집에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우리 둘은 시답잖은 일상 대화가 많아졌다. 어느 날 아들의 뇌구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학교, 친구, 야구, 숙제에서 '엄마의 하루'가 추가되었다. 퇴근하고 옷을 벗은 것도 안 벗은 것도 아닌 채로 급하게 저녁을 차려내는 엄마 옆을 서성이며 요리를 돕다가 엄마의 하루가 어땠는지 묻는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일과 사람이 지금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 정도면 단짝 아닌가. 아들과 단짝이라니 영화 올가미가 연상되지만 어쨌든 이 귀여운 생명체와 나는 단짝이 틀림없다. 덕분에 공감능력고사에서 매번 과락을 맞는 남편은 '단짝'에서 음쓰버리는 사람 혹은 하수구정리기사 정도로 서열이 정리되고 있다.


 고된 하루를 씻고 안방을 좁게 만든 라지킹 침대에 대짜로 누웠다. 네모난 LED등에 지난여름 사투를 벌인 모기의 흔적이 보인다. '모기가 있었구나' 생각하다가 정신이 멍해지더니 잠이 솔솔 온다. 쫑알쫑알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이제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태, 아이들과 꽁냥꽁냥 대다가 잠들기만 하면 되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고 나면 그제야 아이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이야기, 고민들까지. 그 시간은 일상에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엄마에게 터놓는 진솔한 모습이 귀엽고 고맙다.


 이렇게 셋이 한 침대에서 잠든 날은 사실 몸이 찌뿌둥하다. 라지킹이지만 중학생 딸과 고학년 아들과 한등치 하는 엄마가 한 침대에서 자는 건 무리인걸 안다. 아침에 제일 먼저 깬 딸은 밤새 가로로 누워 자는 틈에 불편했는지 자기 방으로 간다. 사춘기 딸은 방을 나가더니 몇 달째 들어오지 않는다. 아늑한 자기 방이 이제 더 편한가 보다. 이렇게 아들과 소울메이트에 이어 룸메이트가 되었다. 이 맑은 영혼이 때 묻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춘기도 잘 지나가리라 믿는다. 늦은 시간에 운동하느라 같이 잠자리에 들지 못할 때에는 이렇게 다정하다.


- 나 먼저 잘게, 어제 늦게 잤으니까 꿈꾸지 말고 어제 못 잔 잠까지 푹 자 엄마.


 아들이 잠들었다. 손에는 책이 들려있고 두 눈은 감겨있다. 유튜브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9월 어느 날이었다. 아이의 핸드폰으로 야구경기 중계 카톡을 보다가 야구기사 링크를 클릭했더니 웹사이트가 열리고 기사가 뜬다. '아, 이 방법으로 유튜브를 볼 수도 있겠구나' 아차 싶은 생각에 웹사이트에 유튜브를 검색했다. 로그인되지 않은 알고리즘이 눈에 선명히 나타난다. 믿을 수 없다. 폰에서 앱을 삭제한 이후로 아이가 유튜브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카카오톡의 링크를 타고 아이는 매일 2시간 이상 유튜브를 신나게 봤다는 걸 알았다. '유튜브'는 패밀리링크 앱으로 제한을 걸어놨는데 '항상 허용' 설정을 해둔 카카오톡으로 우회해서 꼼수를 부린 것이다. 일하면서 두 아이를 완벽하게 케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하게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는 것은 절대 말리고 싶다.


 아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알고리즘이 이상하다. 내 눈앞에 보이는 충격적인 영상들은 아들의 시간을 대신 설명했다. 무너져 내린다. 성교육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지난날들이 애잔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다.

아들 성교육은 아들맘의 막중한 임무라 생각한다. 책, 유튜브, 강연에서 배운 것들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이 많았는데 <슬기로운 초등생활> 이은경선생님이 아들과 만든 영상으로 도움을 받아 우리 집 아이들에게 직접 '교육'했던 적이 있다. 남녀는 어떻게 만나고 아이는 어떻게 생기고 너희 몸은 왜 소중한지 설명하던 게 4학년 때의 일이다. 성교육도 소용없는 것인가.

 

 얼마 전 아들이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친구들이 헬스장 입간판에 있는 여성을 보며 쓰다듬고 몸매를 평가하더라는 이야기. 아이는 그 친구들 행동이 이상해서 엄마한테까지 털어놨을 테지. 5학년이면 호기심이 많을 시기이고 스마트폰이 통제가 안되니 문제라며 그 아이들을 걱정하고 그 부모를 원망했었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둡고 음침했다. 부끄럽다. 방관했더라면 차라리 덜 분노했을까? 통제하고 주시했다고 생각한 것이 완전히 엇나갔음을 알게 되니 더 힘들다. 아이에게 따졌다.


 - 이게 다 뭐야? 성범죄자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영상들 보다가 배우는 거야, 너희들은 잠재적 성범죄자야.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 있으면 제대로 살 수가 없어!


 아이는 아무 말이 없다. 눈물만 뚝뚝 턱에 고인다.  아이의 수치심과 엄마의 자괴감이 허공을 맴돈다. 추스를 시간 없이 다시 따져 물었다. 아이는 죄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를 원망했다. 누구 잘못일까. 아니 그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이 괴물 같은 영상들을 아이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실컷 혼난 아이에게 병을 주고 약도 준다.


- 애초에 이런 영상을 볼 수 있게 노출된 게 문제야, 넌 멈출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거고 이해해. 그런데 엄마는 그동안 노력한 게 헛수고가 된 것 같아서 속상해. 엄마가 화나서 심하게 이야기했어 미안해, 네가 앞으로 이런 영상이나 더한 것도 볼 수 있을지도 몰라. 일부러 자극적이게 만든 영상물이고 돈 벌려고 만든 것들이 야. 이 사람들은 여자를 물건취급하는 거야, 영상을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아이를 혼내다가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 탓이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다른 앱으로 유튜브를 볼 경우에 대비해서 폰에 있는 영상 기록들을 지우고 내 계정을 로그인해 두었다. 절대 엄마 계정을 로그아웃하면 안 된다고 못 박았는데 이게 완전한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꼼수 쓰려면 내 계정을 로그아웃하고 로그인되지 않은 채로 영상을 보면 기록이 남지 않기 때문에(알고리즘은 남아있음) 통제가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다. 아이가 씻는 동안 임시방편의 조치를 해놓고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디지털 홍수 속에서 그래도 현명한 부모라고 자부했다. 폰사용시간은 어릴 적부터 제한했고 성교육과 관련해서는 아이와 충분히 대화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알고리즘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아이의 순수한 세상에 균열을 냈다.





 씻고 나온 아이를 안아주고 다독였다.

- 순돌아, 엄마가 진짜 사랑하고, 너 정말 소중한 사람인 거 알지? 나쁜 것들이 네 생각 속에 머물면 네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잊을 수도 있어. 그럼 더 나쁜 것들은 받아들이는 게 점점 쉬워질 거야.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았으면 좋겠어. 소중한 사람은 스스로를 아껴야 해


 퉁퉁 부은 눈에 아이스팩을 올려주고 아들은 잠이 들었다. 누구 잘못인가, 아이는 죄가 없다. 당장 맘카페에라도 호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모중에  방관자도 있을 테고 나처럼 속고 있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뭘 할 수 있을까? 학교에 전화해서 성교육을 제대로 해달라고 해야 할까? 웃긴 소리다. 부모가 지도 못하는 것은 학교도 선생님도 어쩔 수 없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지만, 법과 제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아이들은 위험한 환경에 계속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아들이 맑은 눈으로 “이게 왜 떠?”라고 물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엄마이고, 그 세상을 지켜야 하는 어른이다. 물론 학교와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미디어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만, 어른들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맑은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로부터, 어른들은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어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곤 조용히 다짐한다. 아이가 디지털 세상을 스스로 탐험하게 되는 날이 와도, 그 마음만큼은 맑고 고요하게 지켜낼 수 있도록 오늘부터 조금씩이라도 노력해야겠다고.


결국, 아이가 자라는 동안 함께 배우고 성장해야 할 사람은 어른들이다.



2024년 11월 28일, 호주에서 16세 미만 청소년들의 SNS 이용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한국에서도 곧 비슷한 논쟁이 시작될 것이다. 청소년들이 스마트폰과 SNS를 못하게 했더니, 오히려 정신 건강이 좋아지고 행복도가 높아졌다는 연구 결과를 이 책은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투표권도 없는 청소년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SNS 금지' 못지않게 중요하게 언급하는 부분은 '자유 놀이 시간 확대'이다. 무턱대고 SNS를 금지하기 전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대신할 놀이를 충분히 제공하고 있나'를 고민해야 한다.





글을 마치며, <불안세대>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책은 주로 영미권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현실과 비교하면서 읽어 봐야 한다. 높은 교육열로 인해 자유 놀이 시간이 가장 부족한 나라, 가장 인터넷이 빨리 보급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은 이 책에서 지적한 '현실 세계의 과잉보호, 가상 세계의 과소 보호'를 가장 먼저 경험한 나라 중 하나일 것이다. 영미권과 아시아권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들어맞진 않지만, 한국에서도 이 책의 문제의식에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먼저 경험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한국 성인들도 이미 스마트폰과 SNS에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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