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의 기쁨과 슬픔>
요리를 거의 하지 않던 때에도 가끔 해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는 요리가 있었다. 흔한 재료에 간단한 조리법이지만 주문배달이 쉽지 않고 주메뉴로는 메뉴판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음식. 바로 배추전이다.
내가 배추전을 생각해 낸 건 몇 년 전 한 드라마 리뷰에서 ‘배추전같다’란 글을 읽은 후부터였다. 배추전 같은 영상이라든가 배추전 같은 스토리는 무엇일까란 생각을 하다 내가 아는 배추전을 떠올려봤었다. 어릴 적 엄마는 얼기설기 생긴 넓은 나무 소쿠리에 여러 장의 배추전을 부쳐, 뜨거운 김이 빠지면 쫑쫑 썰어 내 앞에 놓아주었었다. 주로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식사시간이 되기 전의 출출한 오후였다. 하지만 나는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피자나 떡볶이 같은 강렬한 맛을 원했는데 그러기엔 배추전은 너무 밋밋했고, 맛있지만 그 맛은 촌스런 맛있음의 대표 같았다. 일 년에 한 계절씩은 그렇게 맛있게 먹어놓고 배추전은 나에게 평가절하 당하다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후론 완전히 잊혀진 음식이 되었다.
배추전 같다는 감상평을 남긴 그 드라마는 시청률이 낮았다. 보통의 드라마들처럼 숨겨진 비밀이 있었고 평범한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미남미녀가 어느 시골 마을에서 만나긴 했다. 하지만 그 비밀이 폭로되어도 드라마틱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보복도 증오도 아닌 슬픔과 아픔이 담담히 그려졌다. 위로를 하는 사람도 위로를 받는 사람도 다들 누군가에게 받은걸 조심히 돌려주었다. 그렇게 각자의 아픔과 희망을 가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조용조용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시골의 풍경엔 겨울에 이어 봄이 왔고 아픔을 조용히 치유하는 사람들의 미소를 마지막으로 그 드라마는 끝났다. 아! 배추 전! 정말 그랬구나.
그 뒤로 난 어떤 것들을 보며 '배추전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래되어 익숙한 것들, 낡은데 사랑스러운 것들, 조용한데 우직한 것들. 그런 사람과 물건을 보며 나만의 작은 칭찬을 하곤 했다.
새해가 밝으면 흔히들 묻곤 한다. 올해 네가 도전할 일은 뭐냐고? 새해엔 마땅히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안 가본 곳을 가보고 새로운 걸 배워야 제대로 된 새해를 시작하는 것으로 여긴다. 새로운 것의 매력은 강렬해서 그걸 행하는 사람의 삶도 그렇게 만들어줄 거라는 환상을 준다. 하지만 새로움이 익숙함이 되는 것 그리고 익숙함이 평범해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일들과 생각이 익숙해지고 나면 곧장 익숙해서 덜 소중한 것으로 폄하당한다. 자극을 잃은 것들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누군가를 멋있게 포장할 수 없다고 여겨진다. 마치 나에게 배추전이 그랬듯이. 하지만 나를, 많은 사람들을 떠받치고 있는 건 아주 약간의 새로움과 대부분의 익숙함이다. 익숙함의 힘으로 땅에 두발을 단단히 디뎌야 새로운 곳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있다. 매 끼니를 입안을 사로잡는 맛으로만 채울 수 없다. 혀의 균형이 깨져버리고 건강하지 못한 호르몬이 힘을 얻기에. 담백한 음식을 먹어야 매콤함을 즐길 수 있고 슴슴한 맛은 다음의 강렬한 맛을 기대하게 해 준다. 익숙해서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그 당시엔 생생했던 우리의 기쁨이었고 슬픔이었다. 그래서 익숙함엔 그 모든 게 이미 첨가되어 있다.
그 뒤로 이따금 배추 전을 부쳐먹는다. 몇 번 부치며 알게 된 사실들이 있다. 겨울의 배추란 아무렇게나 먹어도 맛있는 고마운 재료라는 것. 그래서 누가 부쳐도 배추전은 맛있다는 것. 나같이 귀찮음이 많은 사람은 밀가루보다 밑간이 되어있는 부침가루가 편하다는 것. 엄마의 양념장엔 알록달록 가득했던 홍고추 같은 고명들이 없어도 몇 방울의 참기름만으로 충분히 고소하다는 것. 그렇게 배추전은 나의 손에서도 달고 시원하고 맛있게 만들어진다. 호호 불어 먹어본다. 내가 배추전을 떠올려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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