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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Jul 17. 2024

울리고 웃기는 단무지

 학원 강사로 지내던 20대 때 알게 된 친구가 있다. 나보다 5살 정도 어렸던 남사친이었던 그 친구는, 늘 씩씩하고 학원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성실하고 유머 넘치는 성격이었다.

 학원이 끝나고 저녁때 우린 김밥을 먹으러 갔다. 평상시의 듬직함과는 다르게, 그 친구는 김밥에 있는 모든 단무지를 젓가락을 이용해 쏙쏙 모두 빼버리고 먹었다.     


“야, 넌 애기도 아니고……. 편식하니? 그럼 차라리 아까 아줌마한테 단무지 빼달라고 하지 그랬어?”

“누나, 전 단무지 빼는 맛으로 김밥 먹어요. 근데 편식하는 건 맞아요. 하하하하.”     


 쌓여있는 노란 젤리 같은 단무지 위에 친구의 고백이 더해졌다. 중학교 때 엄마가 집을 나가시는 바람에 그때부터 혼자 살아왔고, 엄마가 남기고 떠난 빚을 갚기 위해 고등학교 때 안 해본 일이 없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김밥집을 채웠다. 더는 듣기 힘든 슬픈 이야기에 입맛이 똑 떨어진 나와는 다르게 그 친구는 김밥을 먹으며 시종일관 웃고 있다. 마치 행복했던 한 장면을 떠올리는 듯 눈과 입이 함께 웃고 있다. 


 내 얼굴은 점점 경직되었다. 단무지 편식에 이토록 슬픈 사연이라니 울컥 눈물이 담겼다. 누군가 지금 이 장면을 보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친구가 아닌 나였다. 그런 나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슬픈 사연은 친구의 유머가 더해지면서 평범한 김밥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누나, 저는 어릴 때, 엄마가 김밥에 항상 달걀이랑 김치만 넣어줬어요. 근데 전 그 김밥을 제일 좋아해요. 친구들 김밥은 김밥도 아니라고, 오히려 제가 놀리고 다녔다니까요?! 요즘도 제가 그 김밥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래요. 단무지가 싫은 것도 있는데, 왠지 김치 대신 들어간 애 같아서 전 그냥 다 빼버려요. 근데 또 단무지가 안 들어가 있는 김밥은 재미가 없어요. 하하하 ”

“그 김밥이 추억의 김밥인가 보다. 엄마와의 추억.”

“그런가 봐요. 근데 생각해 보면 엄마가 특별하게 만든 김밥이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그 두 가지만 넣은 거였어. 하하하하하하.”     


 결국, 내가 지고 말았다. 웃으며 쏟아내는 그 친구의 가슴 시린 이야기에 나도 같이 웃어버렸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내가 울어버린다면, 오히려 쟤가 날 위로하겠지?’ 

 정말 그런 장면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 눈물을 꾹 참았다. 

 웃어도 된다는 듯 웃어버리는 그 친구 앞에서 나도 힘 빼고 그냥 웃었다. 


 단무지를 빼던 그 친구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에게 김밥은, 배고픔에 후다닥 입으로 넣는 한 끼 음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떠올라서 단무지를 빼며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추억이려나.     


‘그렇게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얘기하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말했었지만, 그때 웃으며 얘기해 줘서 고마웠어. 울지 않고 들을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그동안 수많은 작가의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글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유머와 페이소스, 그리고 휴머니즘이었다. 내가 몸담았던 광고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유머는 중요하다. 같은 이성이라도 유머 있는 사람이 더 인기가 좋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유머는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자신을 표현하는 데에도 빠질 수 없는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자 덕목이 되었다.  (『살짝 웃기는 글이 잘 쓴 글입니다』 P50)     


 유머와 페이소스로 범벅된 영화로 『JSA 공동경비구역』을 꼽고 싶다. 영화는 초반에 남한과 북한의 병사들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쳤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 처참한 사건 아래 숨겨진 병사들의 우정을 그리는 박찬욱 감독의 시선은 군더더기 없이 세련되었다. 왜 서로가 만났으며 어쩌다 그토록 비극적인 결말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과정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유머는 분단이라는 거대하고 처절한 상황 아래 숨어있는 평범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들 역시 한반도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청년들이라는 진실.      



 울지 못해 웃어야 했던 순간, 너무 슬퍼서 웃음만 남았던 사건, 한참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던 이야기들 우린 그런 것들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휘몰아쳤던 감정은 시간이 지나도 생명이 꺼지지 않아서, 언제든 마음속에서 또다시 살아난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은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사랑이 필요하지만, 인생을 견디는 데는 유머가 필요하다.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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