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담장, 정겨운 이웃이 사는 곳
귀농귀촌을 꿈꾸며 사는 사람들은 살고 싶은 시골마을과 집에 대한 모습은 공통점이 있다. 집 뒤쪽에 산이 있고 집 앞쪽으로 개울이 흐르고, 햇살 잘 드는 남향에 작은 텃밭 그리고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곳 등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내 집을 사거나 지을 때 가장 피해야 할 것들로 꼽는 것이 집성촌이거나 송전탑, 축사, 묘지가 가까운 곳, 북향 그리고 마을 가운데 위치한 곳 등이라고 한다.
마을 가운데를 피하라는 이유는 이웃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개인 사생활에 영향을 많이 받고, 이웃 간 마찰이 쉽게 발생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마을은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서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살고 싶은 시골집은 다른 외형적인 조건들은 다르지 않으나 외진 곳이 아닌 담장 너머 이웃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마을 가운데이다. 내가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어릴 때 추억 때문이다.
어린 시절 가정 형편으로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던 탓에 애정결핍과 정서적 불안으로 우울한 날들을 보냈었다. 그러던 차에 중학교 입학 후 시골에서 유학을 온 친구를 만나고부터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1학년 때 짝꿍이었던 친구와 가까이 지내다 여름방학에 친구의 초대로 충남 금산에 있는 친구의 시골집에 놀러 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내게 치유가 일어나고 더불어 희망이 생겨났다.
친구네 집은 인삼을 비롯해 여러 작물 농사를 짓고 있었고 그곳은 15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돌로 쌓은 나지막한 담장들 넘어 정겨운 이웃들이 인심을 나누며 살고 있는 전형적 시골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골목길 청소 등 공동작업을 하던 날, 품앗이로 친구집 인삼을 수확하던 날 모두 동네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정자 아래 앉아 웃음꽃을 피우며 새참을 나누어 먹던 장면이다.
4박 5일인가 그곳에 머물며 일손도 돕고, 집 근처 냇가에 가서 헤엄도 치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인삼밭 원두막에서 모기에 뜯겨 가며 장난도 치고 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친구 어머니는 처음으로 외지에서 아들친구가 왔다고 맛있는 음식들도 해 주시고 내내 신경을 써 주셨다. 또 이웃에서도 귀한 서울 손님이 왔다며 옥수수, 감자 등 갓 수확한 것들을 삶아서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 부모님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머무는 내내 가족처럼 관심과 환대를 해준 덕에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고, 언젠가 이런 시골마을에서 인정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싶다는 것이 꿈이 되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친구의 시골집을 갔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그곳을 다녀왔다. 그렇게 만들었던 추억들이 강산이 4번 넘게 바뀌었는데도 아직 내 기억 속에 남아있고 그곳은 늘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그리고 은퇴를 앞두고 귀촌을 꿈꾸던 어느 날 그곳 생각이 났다. 금산은 세종과 그리 멀지 않기에 기억을 더듬어 두 차례 찾아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그 마을을 찾을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 물어보고 찾아가고 싶으나 안타깝게도 25년 전쯤 그 친구와 연락이 두절되어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가 없다. 이곳저곳 수소문도 해보고 각종 SNS로 친구 찾기도 해 보았으나 연락이 닿지 않는다.
두 달간 농촌 살아보기 중 일정을 일찍 마친 날에는 상주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만약 상주에 귀촌을 하게 되면 친구 집이 있던 시골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아 정착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달 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고 세 군데 정도 외형적으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내었다. 주로 경치가 좋고 동네 정취가 정겹게 느껴지는 곳들이었다. 물론 송전탑, 축사 등이 없는지도 확인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를 운영하는 수산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가 상주에서는 승곡 마을이 제일 살기 좋다는 말을 했다. 이곳만큼 사람 냄새나는 곳은 없는 것 같다고...
농촌 살아보기를 하던 승곡 마을의 경우, 집성촌, 송전탑, 축사 등 피해야 할 단점들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곳이라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는 중에 무언가 내 뒤통수를 때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찾던 곳은 친구가 살던 시골처럼 사람들이 인심을 나누며 사는 곳이다. 그런데 내가 한동안 찾아다녔던 곳은 그저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곳인지 여부였지, 승곡마을에서 처럼 살아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이웃에 사는지 알아본 게 아니었다.
수산나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승곡 마을은 피해야 할 단점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훌륭한 장점이 있었다. 바로 내가 이웃하고 싶은 마음씨 따뜻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늘 농촌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마을 대표 J, 사랑방 역할을 하는 촌 카페의 요한과 수산나,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아녜스, 유기농 농사와 함께 마을을 꽃동네로 만들고 있는 쌍둥이네, 마을 사람들 건강을 위해 재능기부를 하는 피트니스 강사 J, 요가강사 A, 길 고양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K 부부 등...
일반적으로 농촌 살아보기 후 농촌에 정착하는 비율이 높지 않으나, 이런 이웃들의 영향 때문인지 승곡 마을에서 농촌 살아보기를 체험한 70% 이상의 사람들이 상주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하고 있다 한다.
내가 원래 시골살이를 하려던 목적을 잠시 망각하고 외형적인 것에만 신경을 썼던 게 머쓱해졌다. 물론 단점도 없고, 좋은 이웃들이 있는 마을이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렇게 모든 걸 다 갖춘 곳을 찾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외형적 조건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아도 시골 정착에 실패하고 떠나거나 귀도를 하는 사례들은 대부분 이웃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경우 거나, 높은 담장을 쌓고 도시에서처럼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한다.
내가 살고 싶은 시골집은 정겨운 이웃들이 가까이 사는 마을 안이다. 단순히 그런 곳을 찾아 자리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가 따뜻한 이웃을 원하듯, 나도 마을에 정착했을 때 누군가의 다정한 이웃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사람 냄새나는 또 다른 승곡 마을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