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소송은 지지부진했다.
변호사는 몇 달째 진척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가끔 들려오는 말은 “기일이 연기 됐습니다.” 그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검진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의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모니터에 뜬 MRI 자료를 들여다보던 그는 말했다.
“작년보다 2배 이상 자랐습니다. 보통 양성 종양이라면 이렇게 빨리 자라지 않아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청신경초종은 보통 1년에 2mm씩 자라는 병. 그런데 1년 사이 8mm나 커졌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느껴왔던 이상 증상들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병은 다시, 본격적으로 나를 침식하고 있었다.
의사는 덧붙였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개두술로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다. 현재로선 양성일 가능성이 높지만, 성장 속도가 일반적이지 않네요. 만약 악성이라면, 하루도 늦출 수 없습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나는 문자로 변호사에게 알렸다.
“종양 크기가 2배 이상 커졌습니다. 개두술과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수술을 위해 입원했다.
10일간의 입원. 10시간에 걸친 개두술.
마취에서 깨어나자 중환자실이었다. 눈을 뜨는 순간, 코와 목을 관통한 인공호흡기가 숨을 막았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안 쉬어져요' 나는 소리 없는 외침을 속으로 삼키며, 살려달라고 침대를 쳤다.
간호사가 말했다.
“이서연 씨 괜찮아요? 일반병실로 옮길 거니, 침대 치지 마세요.”
6인실. 그곳엔 다양한 삶이 함께 있었다.
나는 가장 젊은 환자였다.
80이 넘은 노모와 그녀를 간호하는 50대 아들, 뇌하수체종양 수술을 받은 60대 환자와 그녀의 남편.
새벽에 누군가와 오줌을 지렸고, 병실 안에 묘한 침묵을 남겼다.
나는 그때, 아픈 몸보다 더 아픈 것이 인간의 존엄과 관계라는 걸 배웠다. 그리고 내 약함과 두려움을 조금씩 직면했다.
남편은 내가 피를 뽑을 때마다 기절할 듯 얼굴이 하얘졌다. 정작 아픈 건 나인데, 그의 눈동자엔 공포가 먼저 스쳤다. 나는 아픔에 익숙해졌지만, 그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런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이, 때론 나를 더 단단하게 했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마음이 그때마다 또렷해졌다.
며칠 후, 나는 조용히 2인실로 옮겼다.
거기엔 또 다른 30대 환자가 있었다.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각자의 고통에는 경계가 필요했으니까.
어느 날 아침, 의사가 회진을 돌며 병실에 들어섰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다. 흠칫 놀란 눈빛이 스쳤다. 나는 그의 눈을 마주쳤고,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조직검사 결과는 다행히 ‘양성’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말을 덧붙였다.
“양성이긴 하지만, 성장 속도가 빠른 편입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불안을 지우기엔 부족한 말이었다.
그러나 일단은 안도했다.
‘왜 놀랐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의사가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조용히 옆 침대에 앉은 젊은 환자에게 조직검사 결과를 전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악성입니다.”
병실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내 병이 ‘양성’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했다.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 운명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병실은 다시 조용해졌고, 의사는 그녀에게 잠시 시간을 주겠다며 조용히 물러났다.
남겨진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퇴원하는 날, 날씨는 유난히도 맑았다.
병원 복도를 마지막으로 걸어 나올 때까지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주차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고, 차에 올라타 문이 닫히자 묵직한 슬픔이 벼락처럼 몰려왔다.
‘왜 이렇게 슬플까··· 살아서 나오는 길인데...'
눈물이 터졌다.
남편은 옆자리에서 내 손을 잡고 “괜찮아, 괜찮아”를 되풀이했다.
그 말이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처량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됐지··· 왜 이렇게까지 외롭게 싸워야 하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우리, 집 좀 보고 갈래. 그 집 보고 나면 힘이 날 것 같아.”
아이들의 미래가 담긴 그 집.
차가 골목을 돌아 그 집이 시야에 들어오자 눈물이 흘렀다. 기쁨도 슬픔도 아닌, 그저 ‘버텨온 시간’이 온몸을 눌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왔구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퇴원 후 며칠 동안 잠만 잤다.
약은 강했다.
몸이 붕 뜨는 듯했고, 머릿속은 희뿌연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상하리만치 컨디션이 괜찮았다.
“산에 가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햇살도 바람도 부드러워, 정말로 나아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산 초입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휘청였다. “어? 나··· 쓰러질 것 같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이 하얘졌다. 남편이 나를 붙잡았다.
다음 기억은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고, 누군가는 “119에 전화했어요?”라고 외쳤다. 남편은 울먹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내 정신이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정신은 맑았다.
“괜찮아요.” 힘없이 말했지만, 모든 것이 천천히 또렷하게 보였다.
산을 내려오며 남편은 내 옷을 털어주다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야···”
그제야 알았다. 나도 모르게 오줌을 지린 것이었다.
체념이 스쳤다. 그러나 부끄럽지는 않았다.
‘살았으니 됐어.’
나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봤다.
몸은 쓰러져도, 마음은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 실신은 개두술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수술 부위의 이상 반응은 아니에요. 아마 체력 저하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는 안도와 걱정이 뒤섞인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몸 상태를 잘 살피시고, 6개월 뒤에 다시 오세요. 정기검진으로 충분합니다.”
6개월 후.
또다시 병원,
또다시 검진.
또다시 MRI.
그리고 또다시 들려온 말.
“종양이 다시 자랐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번에는 감마나이프 시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술 당일 아침.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네 곳의 머리뼈에 나사를 박았다.
국소마취를 했지만, 머리뼈가 ‘딸깍’ 소리를 내며 뚫리는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신체가 아니라, 정신이 먼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감마나이프 시술이 시작됐다.
한 시간 남짓한 방사선 치료.
좁은 원통 안에 눕혀진 채, 고정틀을 쓴 머리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나는 폐쇄공포증이 있었고, 그날은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정신과 육체 모두가 완전히 소모된 하루였다.
‘나 혼자 고통받는 싸움이었다.’
나는 그날, 또 한 번 깨달았다.
법은 멈췄지만, 병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내 몸은 이미 이렇게까지 망가졌는데도, 법은 여전히 묻고 있었다.
‘그 병이 정말 업무 때문인가요?’
누구도 내 고통을 직접 보려 하지 않았다.
그 고통은 오직 ‘나 자신’만이 증명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증거였다.
감마나이프의 날.
나는 법정 대신 병원 침대 위에서, 서류 대신 뇌와 뼈로 내 고통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