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부임한 과장은 업무에 빈틈이 없었고, 말보다는 결과를 중시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혹시 또···’
불안이 먼저 앞섰다.
첫 휴직 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질병도, 사정도,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그때.
“휴직할 거면 진작 말하지 그랬냐.”
차가운 말들만 들려왔던 날들.
그래서 이번에는 달랐으면 했다.
굳이 알아달라고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만, 버틸 수 있게만.
그저 조용히, 묻히듯 다닐 수 있게만.
나는 속으로 빌었다.
‘그냥··· 다니게만 해주세요. 더는 설명하지 않게, 더는 눈치 보지 않게, 이제 그만.’
오전 회의 시간.
과장이 또다시 지적을 쏟아냈다.
“이서연 주무관, 이건 누가 봐도 성의가 없잖아요?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요.”
사무실엔 정적이 흘렀고, 후배들은 시선을 피했다.
모두가 듣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냥··· 제발 조용히만 살고 싶다. 괴롭히지만 않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 ‘조용한 바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메일함에는 늦은 밤 시간에 도착한 추가 지시와 감정 섞인 지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
“이서연 주무관은 직업 선택을 잘못하신 것 같네요.”
책상 앞에 앉아 문서를 보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조직 안에서 나는 기계보다도 못한 존재인가. 왜··· 버티는 거지? 누굴 위해, 뭘 위해?”
그러나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적막뿐이었다.
창밖엔 어두운 불빛들뿐.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 사방이 막힌 길.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되뇐다.
‘이러다 내가 사라져도··· 누가 기억이나 해줄까.’
하루하루가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퇴근이 임박한 어느 날,
과장이 내 자리로 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이서연 주무관, 최고 선임이던데··· 승진하려면 다른 부서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 말에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눈앞이 순간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숨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단호하게 말했다.
“과장님, 저는 승진보다는 건강이 우선입니다.”
과장은 멈칫했다.
눈빛이 흔들렸고.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한 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승진보다는 건강이 우선입니다.”
나는 조용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조용히 일하려 애썼다.
‘회사는 일만 잘하면 되는 곳.’
그 착각을 마흔 후반까지 하고 있었다니, 참 어리석었다.
이 구역엔 소문난 ‘미친 X’가 있었다.
바로 우리 팀장과 과장이었다.
“그 팀에 있는 이서연 씨···”
“그 팀에서 아직도 버티는 사람···”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구역의 진짜 ‘미친 X'은 다름 아닌 나였다는 걸.
하지만, 미쳐야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곳도 있다.
나는 그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다.
미치지 않기 위해, 내 정신은 반드시 내 편이어야 했다.
그들에게 더는 단 1분, 1초도 내 마음을 쏟을 이유가 없다는 걸.
그래. 내 이야기를 쓰자.
나를 위한 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이야기.
이건 복수도, 증명도 아니다.
생존을 위한 글쓰기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마음을 구해내기 위한 작업이다.
퇴근 후, 나는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출판사에 몇 번 투고도 해봤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래도 그냥 썼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상처를 덜어내기 위해서.
결국 울면서 쓴 글이 나 자신을 치유하는 글이 되었다.
직장에서 쏟아지는 냉소와 무시에 조금씩 무더져 갔다.
나는 관찰자가 되기로 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바라보며 기록하는 사람.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써 내려가던 어느 날.
정기 인사 시즌이 다가왔고, 사무실엔 묘한 소문이 돌았다.
“과장이 팀장을 다른 부서로 보낼 거래.”
속삭임이 오갔고, 분위기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그러고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발령.
그리고, 본청.
예상도 못한 인사였다.
조용한 삶을 원했던 나에게 내려진, 또 하나의 파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