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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마지막 날

by 루비하루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김장을 시작했다.

토요일에 하려고 했지만, 절임배추가 먼저 와버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김치양념 냄새가 집 안을 채웠다.


수능을 끝낸 아들이 옆에서 도와준다.

어릴 땐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앉은자리에서 꼼꼼히 손을 움직인다.

역시 젊음은 다르다.

힘도, 속도도, 집중도.


시댁에서 보내주는 김장을 받아먹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어머니가 김장하다가 휘청하셨어요.”

동서가 했던 그 말 이후,

각자 김장을 하기로 했다.


그 말이 자꾸 떠오른다.

어머니가 휘청했다는 그 장면.

그런데 오늘은

그녀도, 그 말처럼 휘청거렸다.


아들이 세 살 때부터 살던 이 아파트는

이제 곳곳이 세월의 냄새를 풍긴다.

아파트도 늙고,

그녀도 늙고,

여기 오래 살아온 어르신들도

하나둘 70, 80을 넘어가고 있다.


이순재 배우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100세 시대라 말하지만

‘백 년을 산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40대엔 호스피스 지원사업을 맡았고,

50대를 앞둔 지금의 그녀는 아프다.

한때 사업 실패로 비관하던 남편 친구의 부고 소식도

아직 가슴에 남아 있다.


삶, 늙음과 죽음—

이 단어들이

김장 양념처럼

손등에, 마음에,

문득 스며든다.


어느새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겨울은 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계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오고,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조용히 늙어간다.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고,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길목에서,
그녀는 다시
삶의 무게를 한 번 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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